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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녀(海女)문화
제주해녀문화는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제주도는 한반도 남해 바다의 화산섬으로 인구 약 60만 명이 살고 있다. 제주도의 일부 지형은 2007년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다. 제주 해녀들은 보통 잠수를 할 때마다 1분 정도 숨을 참고 수심 10m 아래 바다로 내려가 해산물을 채취한다. 잠수를 마치고 수면에 떠올라 숨을 내뱉을 때는 매우 특이한 소리를 내는데 이를 ‘숨비소리’라고 한다. 해녀는 여름철에는 하루 6~7시간, 겨울철에는 하루 4~5시간, 연간 90일 정도 작업한다. 제주 해녀들이 물질을 통해 얻은 소득은 가정 경제에 큰 도움이 된다. 제주 해녀들은 바다 속의 암초와 해산물의 서식처를 포함하여 바다에 관한 인지적 지도를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다. 또한 해당 지역의 조류와 바람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다. 이러한 머릿속 지도와 지식은 저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된 물질을 통해 경험으로 습득된다. 해녀들은 물질을 할 수 있는 날씨인지 아닌지를 공식적인 일기예보보다 물질 경력이 오래된 상군 해녀의 말을 듣고 판단한다. 제주 해녀들은 바다의 여신인 용왕할머니에게 제사(잠수굿)를 지내 바다에서 안전과 풍어를 기원한다. 잠수굿을 지낼 때는 해녀들이 ‘서우젯소리’를 부르기도 한다. 또한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물질을 할 바다로 나갈 때 불렀던 ‘해녀 노래’ 역시 제주 해녀 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South Korea 2016 -
택견
택견은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택견은 유연하고 율동적인 춤과 같은 동작으로 상대를 공격하거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한국의 전통 무술이다. 천천히 꿈틀거리고 비트는 유연하고 곡선적인 동작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어떤 이는 택견이 춤인지 무술인지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수자에 내재된 에너지는 엄청난 유연성과 힘으로 나타날 수 있다. 택견은 보기에는 정적이고 품위 있으나 근본적으로 활력 있으며 심지어 치명적이다. 택견은 주도권을 장악하는 바로 그 순간까지 상대를 배려할 것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보기 드문 무술이다. 택견은 공격보다는 수비 기술을 더 많이 가르친다. 숙련된 택견 전수자는 부드럽고 물결치는 듯한 움직임으로 신속히 상대를 제압할 수 있지만, 진정한 고수는 상해를 입히지 않고도 상대를 물러나게 하는 법을 안다. 이러한 점은 전투 스포츠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개념이다. 그러나 택견은 이 모두를 가능케 한다. 택견은 자신보다 상대를, 개인보다 집단을 배려하도록 가르치는 경이로운 스포츠이다. 동작은 직선적이고 뻣뻣하기보다는 부드럽고 곡선을 그리듯 하지만, 전수자를 천천히 그러나 강력히 유도하는 힘이 있다. 숙련된 택견 전수자의 우아한 몸놀림은 한 마리의 학 같지만, 탄력적인 공격 기술은 매와 같이 빠르고 강력하다. 택견은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다. 첫째, 곡선을 그리는 듯한 움직임이 특징이어서 외적으로는 부드러우나 내적으로는 강한 무술이다. 둘째, 우아함과 품위를 강조하는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무술이다. 셋째, 걸고 차는 다양한 기술을 통해 공격과 방어의 조화를 이루는 실질적이고 통합된 무술이다. 부드러운 인상을 풍기지만, 택견은 모든 가능한 전투 방법을 이용하며 다양한 공격과 방어 기술을 강조하는 효과적인 무술이다. 택견은 한국 문화의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인 합일과 온전함을 대표한다. 택견은 삼국 시대(57 B.C. - A.D. 676) 이전부터 행해졌다고 믿어진다. 조선 (1392-1910)에서 민중을 포함한 넓은 대중들 사이에서 행해졌다. 택견의 기본 정신은 '진실성'이다. 택견은 청렴을 지키고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했던 조선의 학자들의 생각을 내포하고 있는 무예이다. 현재, 한국택견협회는 택견의 전승과 홍보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전국에 위치한 85개의 택견 교육 센터는 택견 전승자의 주요 활동지이며, 이러한 센터 덕분에 한국인들은 쉽게 택견을 접할 수 있다.
South Korea 2011 -
종묘제례(宗廟祭禮) 및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종묘제례악과 종묘제례는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 세계인류구전 및 무형문화유산걸작으로 선정된 후, 2008년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통합되었다. 서울에 있는 종묘(宗廟)는 조선 왕조(14세기~19세기)의 조상들에게 바치는 유교 의례를 하는 곳이다. 종묘제례(宗廟祭禮)란 종묘에서 행하는 제향의식으로, 조선시대의 나라제사 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나라에 공적이 있는 공신들의 신주를 모셔 놓은 사당으로, 사직(社稷)과 더불어 국가의 근본을 상징하는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이다. 종묘 정전의 19개 신실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주(49위)가 모셔져 있으며, 영녕전 16실에는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34위)를 봉안하고 있다. • 종묘제례 종묘제례는 이러한 조상의 영혼이 안식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당인 종묘에서 수행하며, 조상의 영혼이 영원한 평화를 누리도록 간구하는 것을 포함한다. 종묘제례는 왕족의 후손들이 제례를 조직하며 음악, 무용, 노래가 포함되어 있다. 의례가 봉행되는 동안, 제관들은 의례복을 입으며 왕은 왕관을, 다른 이들은 관을 써서 복장을 갖추고 음식과 술을 제기에 담아 조상에게 바친다. 종묘제례는 왕실에서 거행되는 장엄한 국가 제사로서, 임금이 친히 받드는 존엄한 길례(吉禮)였다. 유교사회에서는 길례·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家禮)의 다섯 의례(五禮)가 있는데 그중 길례인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이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다. 유교가 국가의 근본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는 조상에 대한 숭배를 인간의 도리이자 나라를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법도로 여겼으며 이러한 법도를 실행하는 제사를 특히 중시하였다. 그래서 예로부터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나라를 건국하고 번영시킨 왕과 왕실의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국가 발전에 공헌한 문무 대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종묘제례의 전통은 조상신 숭배와 효의 개념에 관한 고대 중국 문헌에서 유래하지만 중국에서는 더 이상 행해지지 않는 유교 의례의 고유한 사례로 남아 있다. 종묘제례는 크게 정시제(定時祭)와 임시제(臨時祭)로 나뉘며, 계절에 따라 햇과일이나 곡식을 올리는 천신제(薦新祭)도 있었다. 정시제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첫달인 1월·4월·7월·10월과 납일(臘日, 12월에 날을 잡아 지내는 섣달제사)에 지냈으며, 임시제는 나라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마다 지냈다. 종묘제례는 해방 이후 한때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1969년부터 전주리씨대동종약원이 행사를 주관하여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봉행하고 있다. 종묘제례는 제사를 지내는 예법과 예절에 있어서 모범이 되는 의식이기 때문에 제례는 매우 엄격하고 장엄하게 진행된다. 의례의 절차는 15세기에 정해졌으며 오늘날까지 대부분 그대로 남아있다. 종묘제례의 절차는 신을 맞이하는 절차, 신이 즐기도록 하는 절차, 신을 보내드리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절차를 보면 선행절차 → 취위(就位, 제사가 시작하기 전에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 영신(迎神, 조상신을 맞이함) → 신관례(晨祼禮, 왕이 제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 진찬(進饌, 음식과 고기를 드림) → 초헌례(初獻禮, 초헌관이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 아헌례(亞獻禮, 신에게 둘째 술잔을 올림) → 종헌례(終獻禮, 마지막 술잔을 올림) → 음복례(飮福禮,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 철변두(撤籩豆, 제상에 놓인 고기나 과일을 거둠) → 송신(送神, 조상신을 보냄) → 망료(望燎,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를 태움) → 제후처리(祭後處理)의 순서로 진행된다. 종묘제례는 최고의 품격으로 유교절차에 따라 거행되는 왕실의례이며, 이를 통해 동양의 기본이념인 ‘효’를 국가차원에서 실천함으로써 민족공동체의 유대감과 질서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와 함께 종묘라는 조형적 건축공간에서 진행되는 종묘제례의 장엄하고 정제된 아름다움은 자연과 어우러진 동양적 종합예술의 정수이며, 5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한국의 소중한 정신적 문화유산이다. • 종묘제례악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은 종묘제례가 봉행되는 동안 연주되는 음악으로 기악(樂)과 노래(歌)에 춤(舞)이 함께 연행된다. 음악은 각각의 절차에 따라 보태평과 정대업 11곡이 한국의 전통 악기로 연주된다. 종묘제례악은 편종, 편경, 방향(方響)과 같은 타악기가 주선율을 이루고, 여기에 당피리·대금·해금·아쟁 등 현악기의 장식적인 선율이 더해진다. 이 위에 장구·징·태평소·절고·진고 등의 악기가 더욱 다양한 가락을 구사하고 노래가 중첩되면서 종묘제례악은 그 어떤 음악에서도 느끼기 어려운 중후함과 화려함을 구사한다. 정전 앞 계단 위(상월대)에서 노랫말이 없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은 등가(登歌)라 하고, 계단 아래 뜰(하월대)에서 노랫말 있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은 헌가(軒架)라고 부른다. 악기 편성은 시기에 따라 변화가 있었으나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착되었다.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의 간결하고 힘찬 노래는 위대한 국가를 세우고 발전시킨 왕의 덕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종묘제례악이 연주되는 동안 문치와 무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용佾舞(일무)인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곁들여 진다. 무용의 문무와 무무는 8줄로 구성된 64명의 무용수가 추며, 유교 문헌에 나오는 대로 대립하지만 서로 보완적인 음(陰)과 양(陽)을 표현한다. 문무는 역대 선왕들의 문덕을 기리는 춤으로 조화롭고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보태평지악에 맞추어 왼손에는 피리종류인 약을 오른손에는 깃털을 단 적(翟)을 들고 춤을 추는 데 왼쪽으로 첫걸음 하는 것이 특징이다. 문무는 양을 상징한다. 무무는 선왕들의 무공을 칭송하는 춤으로 정대업지악에 맞추어 나무로 만든 칼과 창, 활과 화살을 들고 추며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며 음을 상징한다.
South Korea 2008 -
영산쇠머리대기 (靈山쇠머리대기)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영산쇠머리대기는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서 대보름축제를 배경으로 전승해온 대동놀이이다. 영산쇠머리대기는 나무로 엮어 만든 소를 어깨에 메고 맞부딪쳐서 상대방의 쇠머리를 쓰러뜨려 승패를 가르는 집단놀이이다. 영산쇠머리대기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영산의 영축산과 작약산(함박산)의 형상이 마치 두 마리의 황소가 겨루고 있는 것 같다 해서 산의 나쁜 기운을 풀어주고, 불행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영산쇠머리대기는 일종의 편싸움 놀이로, 마을을 동·서로 갈라 두 패로 편을 짜는데 이긴 편 마을에는 풍년이 들고 진 편 마을에는 흉년이 든다고 해서 농경의식의 하나로 전해져 왔다. 영산지방에서는 나무쇠싸움 목우전(木牛戰)이라는 이름으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민속놀이였으나 현재는 3·1문화제 행사의 하나로 줄다리기와 함께 행해지고 있다. 대보름이 다가오면 산신에게 고사를 지내고 나무를 길이 약 10m 정도로 베어온다. 통나무 3개를 세워 위를 하나로 묶고 아래 발은 넓게 펴 큰 통나무에 고정시켜 넘어지지 않도록 한다. 세운 나무 중간에 나무를 가로로 대고 튼튼하게 묶어 사람이 잡고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한다. 나무쇠 밑바닥에는 통나무를 가로, 세로 5∼6개씩 대고 엮어 땅에 놓아도 안정적이면서 싸울 때 메기 좋도록 한다. 앞에 세운 통나무 부분에 소머리 모형을 깎아 세우거나 가면을 만들어 세운다. 나무쇠를 메고 싸움터로 나가기 전에 동서 양편에서는 농악을 치고 깃발을 흔들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쇠머리 위에서는 대장, 중장, 소장 세 사람이 올라타고 지휘를 하는데, 사람들은 대장의 지휘에 따라 힘차고 민첩하게 행동해야만 승리할 수가 있다. 상대방의 쇠머리를 쓰러뜨리거나 자기 편의 쇠머리로 상대방의 쇠머리 위를 덮쳐 땅에 닿게 하면 이기게 된다. 영산쇠머리대기는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공동체의 민속놀이이며, 영산지방에서 생겨나 영산지방에서만 전승되어 오는 독특한 놀이이다.
South Korea -
영산줄다리기 (靈山줄다리기)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영산줄다리기는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서 전승되는 민속놀이로 현재는 3·1문화제 행사의 하나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줄다리기는 마을을 동·서로 갈라 두패로 편을 짜서 노는 편싸움으로, 동서 양편은 각각 남성과 여성으로 상징되며, 생산의 의미에서 여성을 상징하는 서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전한다. 줄다리기는 줄쌈이라고도 하며 영산지방에서는 ‘줄땡기기’ , ‘갈전(葛戰)’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산의 칡넝쿨보다 길게 줄을 만들어 당겼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줄다리기는 주로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벼농사를 위주로 하는 중부 이남지역에서 널리 행해지는 농경의식의 하나로 보고 있다. 줄의 길이는 40∼50m이며 몸줄의 지름이 1m가 넘는 경우도 있어 사람이 줄을 타고 앉으면 두 발이 땅에 닿지않을 정도라고 한다. 줄이 커서 손으로 잡아 당길 수가 없기 때문에 줄 중간 중간에 가늘게 만든 곁줄(벗줄)을 여러 개 매달아 잡아당기기 좋도록 만든다. 끝에는 꽁지줄이라 해서 가는 줄을 10개정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매달릴 수 있도록 한다. 동·서 양편의 줄을 제각기 만들어 줄다리기 하는 당일에 연결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잡아당겨도 끊어지거나 풀어지지 않도록 비녀목이라 부르는 큰 나무토막을 꽂아둔다. 줄 위에 올라선 대장이 지휘를 하면 줄다리기가 시작되고, 각 마을의 농악대는 빠른 장단으로 사람들의 흥을 돋운다. 영산줄다리기는 현대에 이르러서 그 규모가 작아졌지만, 용사(龍蛇 :용과 뱀)신앙에 바탕을 둔 농경의례놀이로 암줄과 숫줄의 모의 성행위를 통해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거나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공동체의 민속놀이이며, 온 마을이 참여하는 향토축제로서 그 의의가 있다.
South Korea 2015 -
인삼 재배와 약용문화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인삼은 우리나라에서 오랜 기간 동안 재배, 활용되면서 이를 매개로 한 음식·의례·설화 등 관련 문화도 풍부하다. 오래 전부터 인삼은 그 효능과 희소성으로 말미암아 민간에게 불로초(不老草) 또는 만병초(萬病草)로 여겨졌으며, 이는 민간신앙, 설화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각종 생활용품에 사용되는 인삼 문양은 건강과 장수라는 인삼의 상징성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에도 몸에 이롭고 귀한 약재이자 식품이라는 인삼의 사회문화적 상징은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처럼 ’인삼 재배와 약용문화‘는 ▲ 오랜 역사를 가지고 한반도 전역에서 전승되고 있다는 점, ▲ 조선 시대의 각종 고문헌에서 그 효과 재배 관련 기록이 확인되는 점, ▲ 한의학을 비롯한 관련 분야의 연구가 활발하고, 농업 경제 등 다방면에서 연구의 가능성이 높은 점, ▲ 음식·의례·설화 등 관련 문화가 전승되고 있는 점, ▲ 인삼의 약효와 품질이 우수하여 역사상 국제 무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점, ▲ 재배 농가를 중심으로 한 지역별 인삼조합, 인삼 재배 기술과 상품성을 높이기 위한 각종 연구 기관과 학회, 그리고 국가와 민간 지원 기관 등 수많은 공동체와 관련 집단이 있는 점, ▲ 현재에도 세대 간의 전승을 통하여 경험적 농업 지식이 유지되고 있는 점에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았다. ※ '인삼'이 특정 지역에 한정되어 전승되는 전통지식과 기술이 아니므로 특정한 보유자 또는 보유단체을 인정하지 않고 종목으로 지정함
South Korea -
막걸리 빚기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막걸리는 쌀 등의 곡물과 누룩, 물로 빚는 우리 고유의 술로서 삼국시대 이전 농경이 이루어진 시기부터 빚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선비의 문집(文集) 등에서‘막걸리’로 추측되는 기록이 확인되며, 조선시대‘규합총서’,‘음식디미방’등의 조리서류에서 막걸리의 제조 방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당대 한글 소설 등에서 막걸리의 한글 표현이 확인된다. 막걸리는 물과 쌀, 누룩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쉽게 접할 수 있었고,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는 술의 대명사가 되었다. 농사꾼들 사이에서는 “같은 품삯을 받더라도 새참으로 나오는 막걸리가 맛있는 집으로 일하러 간다.”라고 할 정도로 농번기에는 농민의 땀과 갈증을 해소하는 농주(農酒)로 기능하였다. 또한, 막걸리는 예로부터 마을 공동체의 생업·의례·경조사에서 빠지지 않는 요소였다. 오늘날에도 막걸리는 신주(神酒)로서 건축물의 준공식, 자동차 고사, 개업식 등 여러 행사에 제물로 올릴 정도로 관련 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막걸리는 많은 국민이 즐기고 향유하는 대중적인 술이다. 조선 시대까지 막걸리는 집집마다 가양주(家釀酒)로 빚어 집안 특유의 술맛을 유지해 왔으며, 김치, 된장과 같이 각 가정에서 직접 만들어 먹던 발효음식의 하나였다. 근대 이후 국가 정책의 흐름에 따라 가양주 대신 양조장 막걸리가 일반화되고 재료가 변화하기도 하였지만,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2000년대 이후에는 막걸리 열풍이 불면서, 자가 제조도 증가하는 추세다. * 가양주: 집에서 담근 술. 일제강점기에 주세법이 강화되면서 가양주는 밀주(密酒)로 단속의 대상이 됨. 1995년부터 자가 소비용으로 가양주를 제조하는 것이 다시 허용됨. 이처럼 ‘막걸리 빚기’는 무형문화재로서 역사성, 학술성, 대표성, 사회문화적 가치,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었다. 다만, ‘막걸리 빚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온 국민이 전승·향유하고 있는 문화라는 점에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는 인정하지 않고 종목으로만 지정하였다.
South Korea -
가곡(歌曲), 국악 관현반주로 부르는 서정적 노래
가곡은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한국 음악에서 정가란 정악(正樂)에 해당하는 성악곡을 일컫는다. 가곡·가사(歌辭)·시조(時調)가 정가이며, 이 곡들은 상류 계층 사람들이 인격 수양을 목적으로 부르곤 했다. 가사나 시조와 같은 정가의 형식과 달리, 가곡은 6현 치터인 거문고, 가로로 부는 커다란 대나무 플루트인 대금, 12현 치터인 가야금, 피리 등의 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부른다. 가곡은 음악적·예술적 완성도가 높다. 가곡은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 제2조 1항에 명시된 ‘공동체와 집단 및 개인이 스스로 문화유산의 일부분이라고 인식하는 관습·표상·표현 그리고 지식 및 기술’이라는 무형문화유산의 정의에 합치한다. 가곡은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 제2조 2항의 ‘공연예술’ 영역에 해당된다. 전통 가곡은 오랫동안 한국 사람들이 불러온 고유한 예술 형식으로서, 서양의 성악과는 다르다. 가곡은 조선 시대(1392년~1897년) 상류 계층에서 유행하던 성악곡이다. 가곡은 남성의 노래인 남창 26곡과 여성의 노래인 여창 15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남성 가창과 여성 가창의 특성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창의 모든 음계는 몸속에서 울려 나오는 힘찬 소리인 겉소리로 부른다. 반면에 여창은 겉소리와 고음의 가냘픈 소리인 속소리를 사용한다. 가곡은 장엄하면서도 평화로운 음계인 우조(羽調)와 구슬픈 음계인 계면조(界面調)를 사용하고, 16박 또는 10박 장단으로 연주된다. 반주는 보통 6현 치터인 거문고, 12현 치터인 가야금, 세피리(겹혀의 작은 악기), 가로로 부는 플루트인 대금(大笒), 바이올린 같은 악기인 해금(奚琴), 모래시계 모양의 드럼인 장구 등의 관현악기로 연주된다. 덜시머(hammered dulcimer)와 같은 양금(洋琴)과 대나무 플루트인 단소(短簫)가 반주에 포함되는 경우도 있다. 가곡은 오랜 세월동안 변형되지 않고 보전되어 왔으며 가곡 명인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전수되고 있다. 가곡은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큰 무형문화유산이다.
South Korea 2010 -
씨름, 한국의 전통 레슬링
씨름은 201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민속놀이 중 하나인 씨름은 벨트와 비슷한 모양의 긴 천으로 된 샅바를 허리와 한쪽 허벅지에 두른 2명의 선수가 상대의 샅바를 잡고 다양한 기술을 발휘하여 땅바닥으로 쓰러뜨리는 경기다. 명절이나 장날, 잔치 등의 다양한 행사에서 씨름 경기가 열린다. 마을에서 어떤 장소든 씨름 경기를 할 수 있으며,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공동체 구성원 전 연령이 참여할 수 있다. 성인 경기에서 최종 우승자는 풍년을 상징하는 황소를 부상으로 받고, ‘장사’라는 자격을 얻는다. 경기를 마친 후 장사는 황소를 타고 마을을 행진하며 축하를 받는다. 부상으로 소를 수여하는 풍습에는 농사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South Korea 2018 -
농악(農樂)
농악은 201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농악은 타악 합주(때때로 관악기가 포함되기도 함), 행진, 춤, 연극, 기예의 요소가 한데 어우러진 일종의 종합 공연 예술 장르이다. 농악은 마을신과 농사신을 위한 제사, 액을 쫒고 복을 부르는 축원, 봄의 풍농 기원과 추수기의 풍년제, 마을 공동체가 추구하는 사업을 위한 재원 마련 행사, 그리고 전문 농악패들에 의한 여흥 등 실로 다양한 목적으로 연행되어 왔다. 마을의 흥겨운 행사치고 화려하게 치장한 농악대의 떠들썩한 음악과 춤으로 마무리되지 않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농악 공연이 북돋는 흥겨운 기분, 즉 신명은 한국인에게서 발견되는 가장 두드러진 감정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음악의 장단은 흔히 3소박과 혼박, 혼소박 등 불균등 구조의 복잡한 리듬이 많이 사용된다. 쇠와 가죽으로 음색을 내는 꽹과리와 장구가 주요 리듬을 연주하는 한편, 징과 북은 단순한 리듬으로 음악에 강세를 만들어준다. 소고를 연주하는 연행자들은 음악 연주보다는 춤에 더 치중한다. 농악 춤은 개인의 기량을 보여주는 춤과 함께 단체가 만드는 진짜기, 상모놀음 등이 포함된다. 탈을 쓰거나 특별한 옷차림을 한 잡색들이 재미난 촌극을 보여주는 것으로 연희가 진행되고, 버나돌리기나 어린 아이를 어른 연행자의 어깨 위에 태워 재주를 보여주는 무동놀이와 같은 기예도 함께 연행된다. 농악은 기층민들에 의해 가장 빈번하게 연행되고 향유되지만 신명나는 공연을 보여주는 전문연희패들도 다수 활동하고 있다. 최근 전문적인 레퍼토리는 타악 4중주에 해당하는 ‘사물놀이’와 넌버벌(non-verbal) 연극 ‘난타’와 같은 작품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런 시도는 음악적인 요소만을 극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국내외에서 보다 광범한 청중의 감성에 다가갈 수 있다.
South Korea 2014 -
연등회(燃燈會), 한국의 등 축제
연등회는 202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음력으로 4월 8일, 부처님탄신일이 다가오면 전국적으로 형형색색의 등불이 밝혀진다. 본래 석가모니 탄신일을 기념하는 종교의식에서 비롯된 연등회는 오늘날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전국적인 봄 축제가 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불교와 연등회에 관한 기록은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등회는 고려시대(918-1392) 부처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석가모니의 탄생을 축하하는 종교 의식에서 비롯된 연등회는 전국을 대표하는 봄축제가 되었다. 대중들은 자신들과 그들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웃들과 나라 전체를 위해 좋은 소망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등불을 들고 그 축제에 참여할 수 있다. 등불은 또한 부처의 지혜를 통해 개인, 공동체, 그리고 사회 전체의 마음을 깨우치는 것을 상징한다. 이 연례 축제의 주요 요소는 석가모니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식으로서 아기 부처의 이미지를 목욕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신성한 의식은 랜턴을 든 참가자들의 공개 행렬에 이은 것이다. 행렬을 마친 참가자들은 레크리에이션 행사를 위해 모인다. 사회적 경계가 일시적으로 지워지면서 단결 정신은 집단 게임 활동으로 절정에 이른다. 사찰 또는 공공 공간 장식을 목적으로 대나무 틀 또는 한지로 감싼 철사로 만들어진 등불은 전통 장인들이 지식과 기술을 일반 참가자들과 함께 공유하여 만든 것이다. 일반인들은 자신과 가족, 이웃,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복을 비는 마음으로 자신이 만든 연등을 들고 참여할 수 있다. 등불을 밝힌다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 전체 사회의 마음을 밝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해마다 열리는 연등회는 석가모니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식으로 아기 부처상을 목욕시키는 관불(灌佛) 의식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 다음 연등을 손에 든 대규모 인파의 행렬이 이어지고, 이후 참가자들은 단체 게임에서 절정에 이르는 전통놀이를 하기 위해 모인다.
South Korea 2020 -
떡 만들기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떡은 곡식가루를 시루에 안쳐 찌거나, 쪄서 치거나, 물에 삶거나, 혹은 기름에 지져서 굽거나, 빚어서 찌는 음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일생의례(백일·돌·혼례·상장례·제례)를 비롯하여 주요 절기 및 명절(설날·정월대보름·단오·추석) 등에 다양한 떡을 만들고 나누어 먹는다. 또한 떡은 마을신앙 의례, 가정신앙 의례, 각종 굿 의례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제물(祭物)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개업떡·이사떡 등을 만들어서 이웃 간에 나누는 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지·전승되고 있다. 이처럼 떡은 한국인이 일생동안 거치는 각종 의례와 행사 때마다 만들어서 사회구성원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음식으로 ‘나눔과 배려’, ‘정(情)을 주고받는 문화’의 상징이며, 공동체 구성원 간의 화합을 매개하는 특별한 음식이다. 또한 의례별로 사용되는 떡은 상징적 의미가 깃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무형적 자산이다. 청동기·철기 시대 유적에서 시루가 발견된 점 등을 미루어 고대에도 떡을 만들어 먹었다고 추정된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각종 문헌 등에서도 떡을 만들어 먹은 내용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조선시대에는 농업 기술이 발달하고, 조리가공법이 발전하면서 떡 재료와 빚는 방법이 다양화되어 각종 의례에 떡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특히, 궁중과 반가(班家)를 중심으로 떡의 종류와 맛이 한층 다양해지고 화려해졌다. 우리나라의 떡은 지역별 지리적 특성을 반영한 산물들이 그 재료로 활용되고 있다. 강원도는 감자와 옥수수의 생산이 많아 ‘감자시루떡’·‘찰옥수수시루떡’ 등이 전승되고 있고,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인 제주도는 예로부터 쌀이 귀하고 잡곡이 많이 생산되어 떡 재료로 팥·메밀·조 등이 재료로 활용되어 ‘오메기떡’·‘빙떡’·‘차좁쌀떡’ 등이 전승되고 있다. 19세기 말 서양식 식문화 도입으로 우리 고유의 식생활에 변화가 생겼고, 떡 만들기 문화도 일부 축소되었으며, 떡 방앗간의 증가로 떡 만들기가 분업화되고 떡의 생산과 소비 주체가 분리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다양한 떡이 지역별로 전승되고 있으며, 의례, 세시음식으로 만들고 이웃과 나누는 문화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이처럼 ‘떡 만들기’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한반도 전역에서 전승·향유되고 있다는 점, 삼국 시대부터 각종 고문헌에서 떡 제조방법 관련 기록이 확인되는 점, 식품영양학, 민속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의 학술연구 자료로서의 가능성이 높다는 점, 지역별 지리적 특성을 활용한 다양한 떡의 제조가 활발하고, 지역별 떡의 특색이 뚜렷한 점, 현재에도 생산 주체, 연구 기관, 일반 가정 등 다양한 전승 공동체를 통하여 떡을 만드는 전통지식이 전승·유지되고 있는 점에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았다. 다만, ‘떡 만들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온 국민이 전승·향유하고 있는 문화라는 점에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는 인정하지 않고 종목으로만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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