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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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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濟州 칠머리당 영등굿)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은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혹독한 환경 조건 때문에 제주도에는 사람이 살기에 힘들었으므로, 섬사람들은 바다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조선시대의 문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는 ‘부도덕한 공양을 가치 있게 여기는 풍습이 있으며, 숲, 호수, 산, 나무, 돌 등의 신령을 받드는 제사가 이루어진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제주도에는 여러 가지 제의적 활동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영등굿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영등의 때가 되면 잔잔한 바다와 풍어를 기원하는 여러 굿이 섬 전역에 걸쳐 벌어진다. 이들 굿 가운데 칠머리당에서 열리는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이 가장 중요하다.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이라는 이름은 바람의 여신에 대한 굿임을 의미하지만, 마을의 여러 수호신과 바다의 용왕에게 바치는 굿이기도 하다. 영등은 숭배를 받기도 하지만 바다를 휘저어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한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영등이 섬에 와 있는 2월 초부터 중순까지 제주의 바다는 특히 험난하다. 섬사람들은 영등이 지나가는 자리의 바닷가 조개류는 껍질만 남게 된다고 믿었는데 이것은 영등신이 조개류의 속을 다 까먹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등이 떠나는 날이 되면 영등은 해안을 따라 씨를 뿌려주어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며, 영등이 떠나면서 바다를 다시 맑게 해서 해조가 잘 성장하도록 도와준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영등이 머물고 있는 때는 가장 중요한 때이며, 사람들은 영등에게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면서 칠머리당에서 굿을 벌여 영등이 머무는 기간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던 것이다. 영등굿이 치러지는 마을 이름(건입동의 속칭이 ‘칠머리’이다)을 따서 이름 붙인 칠머리당이라는 사당에서는 영등, 그리고 도원수감찰지방관(都元帥監察地方官)과 요왕해신부인(龍王海神夫人)이라는 부부신(夫婦神)을 모신다. 도원수감찰지방관은 지역민의 요구(도원수감찰지방관이 영역)를 담당하는 신이며, 요왕해신부인은 어부와 해녀의 생계(요왕해신부인의 영역)를 담당하는 신이다. 사당에는 아래의 표와 같이 남녀 신의 위패를 모신다. 음력 2월 1일이 되면 칠머리당에서는 영등신이 들어오는 영등환영제를 열고 2월 14일에는 영등송별제를 연다. 산신을 모시는 제사(당제)는 한국의 여러 지방에서 음력 정월에 거행되는데, 제주도의 여러 촌락에서도 이 기간 동안 이루어진다. 산신을 모시는 제사와 영등을 모시는 제사는 오직 제주도에서만 ‘영등굿’이라는 하나의 무속 제례와 결합되어 있다. 단순한 영등환영제와 비교할 때, 무속 제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로 간주되며 용왕에 대한 제사까지 포함하고 있는 영등송별제는 그 행사가 매우 화려하고 더욱 중요하다. 영등환영제는 신령을 불러 사당으로 들이는 것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행운을 비는 초감제(初監祭)로부터 시작하여,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제로 이어진 뒤 조상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3막 연희인 석살림굿으로 끝낸다. 영등송별제도 역시 초감제로 시작하지만, 거기에는 마을의 사당으로 들어오는 의례 본향듦이 포함되어 있다. 본향듦은 마을의 수호신인 남녀 부부신인 도원수감찰지방관과 요왕해신부인에게 마을의 안녕을 축원하는 것이다. 이 제례에서는 3명의 고을 관리가 부부 신에게 술을 올리며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소원을 빈다. 그 다음에 모든 신에게 술과 떡을 권하여 올리는 추물공연, 용왕과 영등을 맞이하여 그들에게 풍어와 어부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요왕맞이, 수수의 씨로 점을 치고 해조류의 씨를 뿌리는 행사인 씨드림이 이어진다. 그 다음에는 수탉을 던져 마을 전체의 재앙을 막기 위한 도액막음을 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해녀들을 위해 점을 치는 순서도 있다. 그 다음에 마을의 노인들이 바다에 짚으로 만든 배를 띄워 보내는 배방선이 이어진다. 영감놀이는 배상선 앞에 ‘굿중놀이’로 삽입되어 있다. 영등송별제는 마지막에 여러 신들을 돌려보내는 도진으로 끝맺는다.
South Korea 2009 -
서울 새남굿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서울 새남굿은 사회 상류층이나 부유층에서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고 좋은 세상으로 인도하기 위해 행했던 서울지역의 전통적인 망자천도굿이다. 새남굿은 조선시대에 형성되었다가 17·18세기경에 오늘날의 형태로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새남굿은 안당사경맞이와 새남굿으로 구성된다. 안당사경맞이는 새남굿이 벌어지는 전날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주당물림을 시작으로 부정, 가망천배, 진적, 불사거리, 도당거리, 초가망거리, 본향거리, 조상거리, 상산거리, 별상거리, 신장, 대감거리, 성주거리, 창부거리, 뒷전거리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다음날 아침부터 이어지는 새남굿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굿으로, 여자무당 5명과 잽이 6명이 참여하며, 장구와 북, 대금, 피리 등 삼현육각이 동원된다. 굿은 새남부정, 가망청배, 무당이 시왕(十王)의 신비롭고 훌륭함을 찬양하는 중디밧산, 저승사자를 놀리는 사제삼성거리, 무당이 옛 왕녀의 화려한 옷을 입고 조상이라 섬기는 바리공주의 노래를 부르는 말미, 왕녀복장을 한 무당이 지장보살을 모신 연지당 앞의 저승문을 돌고 문사자(門使者)와 이야기를 나누고 문을 통과하는 도령(밖도령), 무당이 지장보살의 자비를 구하는 영실, 바리공주가 저승의 12대문을 안전하게 통과하려고 애쓰는 도령(안도령) 유족이 무당에게 유교식 제사를 드리는 상식, 죽은 사람의 혼이 무당에게 씌이면 무당이 유족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전하는 뒷영실, 무당이 이승다리와 저승다리를 상징하는 무명과 베를 몸으로 찢어 길을 헤쳐주는 베가르기, 저승의 십대왕을 호위하는 신장들에게 망자의 길을 인도하고 보호하는 시왕군거리, 새남굿을 찾아온 제반 신령들에게 모든 정성을 드렸음을 알리고 잡귀잡신도 대접하는 뒷전으로 끝나게 된다. 서울 새남굿은 다른 무속의례에 비하여 굿이 많고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화려하다. 또한 망자와 관련된 무(巫)와 불교·유교사상이 적절하게 혼합되어 있고, 조선시대의 궁중문화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South Korea -
안동차전놀이 (安東車戰놀이)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안동차전놀이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안동지방에서 행해지던 민속놀이의 하나로 동채싸움이라고도 부른다.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의 싸움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 놀이를 위해 연말이면 안동 근처에서 적당한 나무를 미리 골라 두었다가 산신에게 고사를 지내고 나무를 베어 운반한다. 동채의 크기나 견고성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동채를 만들 때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대문을 잠그고 만든다. 마을을 동서로 나누어 편을 가르는데 거주지가 아닌 태어난 곳을 위주로 편을 나누기 때문에 때로는 부부간에도 편이 다를 수 있다. 대보름날이 되면 동서 양편이 대치하고 서서 농악으로 흥을 돋우고, 동채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기세를 올린다. 동채 위에는 대장이 올라 타고 떨어지지 않도록 왼손으로는 끈을 쥐고 오른손으로는 동채를 멘 사람들을 지휘한다. 동채 앞에서 힘센 장정들이 무리를 이루어 팔짱을 끼고 적과 부딪쳐 서로 어깨로 밀어 길을 낸 뒤, 동채가 밀고 들어가 상대방의 동채를 눌러 땅에 닿게 하면 이기게 된다. 하지만 싸움 도중에 자기 편이 유리한 순간이라도 적의 머리꾼이 쓰러져 위기에 처하게 되면 즉시 후퇴하여 구출하고 다시 승부겨루기를 한다. 안동차전놀이는 남자들의 집단놀이를 한층 세련되게 향상시킨 모의전투놀이로서 안동지방 특유의 상무정신을 엿볼 수 있다. 또 동부가 이기면 동부에 풍년이 들고, 서부가 이기면 서부에 풍년이 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농경민의 풍년기원을 바탕으로 한 농경의례놀이라 할 수 있다.
South Korea -
영산줄다리기 (靈山줄다리기)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영산줄다리기는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서 전승되는 민속놀이로 현재는 3·1문화제 행사의 하나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줄다리기는 마을을 동·서로 갈라 두패로 편을 짜서 노는 편싸움으로, 동서 양편은 각각 남성과 여성으로 상징되며, 생산의 의미에서 여성을 상징하는 서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전한다. 줄다리기는 줄쌈이라고도 하며 영산지방에서는 ‘줄땡기기’ , ‘갈전(葛戰)’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산의 칡넝쿨보다 길게 줄을 만들어 당겼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줄다리기는 주로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벼농사를 위주로 하는 중부 이남지역에서 널리 행해지는 농경의식의 하나로 보고 있다. 줄의 길이는 40∼50m이며 몸줄의 지름이 1m가 넘는 경우도 있어 사람이 줄을 타고 앉으면 두 발이 땅에 닿지않을 정도라고 한다. 줄이 커서 손으로 잡아 당길 수가 없기 때문에 줄 중간 중간에 가늘게 만든 곁줄(벗줄)을 여러 개 매달아 잡아당기기 좋도록 만든다. 끝에는 꽁지줄이라 해서 가는 줄을 10개정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매달릴 수 있도록 한다. 동·서 양편의 줄을 제각기 만들어 줄다리기 하는 당일에 연결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잡아당겨도 끊어지거나 풀어지지 않도록 비녀목이라 부르는 큰 나무토막을 꽂아둔다. 줄 위에 올라선 대장이 지휘를 하면 줄다리기가 시작되고, 각 마을의 농악대는 빠른 장단으로 사람들의 흥을 돋운다. 영산줄다리기는 현대에 이르러서 그 규모가 작아졌지만, 용사(龍蛇 :용과 뱀)신앙에 바탕을 둔 농경의례놀이로 암줄과 숫줄의 모의 성행위를 통해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거나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공동체의 민속놀이이며, 온 마을이 참여하는 향토축제로서 그 의의가 있다.
South Korea 2015 -
악기장 (樂器匠)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악기장이란 전통음악에 쓰이는 악기를 만드는 기능 또는 그러한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고구려의 벽화 등을 통해 악기를 만드는 장인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에 악기조성청이라는 독립된 기관을 설치하여 국가에서 필요한 악기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현재 우리나라 국악기는 약 60∼70종으로 가야금과 거문고가 가장 대표적이다. 현악기는 울림통을 오동나무로 하고 밑판을 밤나무와 소나무 등으로 제작 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장식품의 조각은 대추나무나 흑단, 향나무 등을 많이 이용한다. 현악기 이외에도 아쟁·대쟁·호금 등이 주류를 이루고 와공후·수공후·당비파·향비파·양금·금과술 등이 제작되고 있으나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 1995년 3월 16일 북 만드는 공예기술인 북메우기 종목을 악기장에 통합하였으며, 2012년 7월 23일 궁중의례 시 아악연주에 사용하는 편종·편경 제작 기능을 추가 지정하였다.
South Korea -
막걸리 빚기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막걸리는 쌀 등의 곡물과 누룩, 물로 빚는 우리 고유의 술로서 삼국시대 이전 농경이 이루어진 시기부터 빚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선비의 문집(文集) 등에서‘막걸리’로 추측되는 기록이 확인되며, 조선시대‘규합총서’,‘음식디미방’등의 조리서류에서 막걸리의 제조 방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당대 한글 소설 등에서 막걸리의 한글 표현이 확인된다. 막걸리는 물과 쌀, 누룩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쉽게 접할 수 있었고,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는 술의 대명사가 되었다. 농사꾼들 사이에서는 “같은 품삯을 받더라도 새참으로 나오는 막걸리가 맛있는 집으로 일하러 간다.”라고 할 정도로 농번기에는 농민의 땀과 갈증을 해소하는 농주(農酒)로 기능하였다. 또한, 막걸리는 예로부터 마을 공동체의 생업·의례·경조사에서 빠지지 않는 요소였다. 오늘날에도 막걸리는 신주(神酒)로서 건축물의 준공식, 자동차 고사, 개업식 등 여러 행사에 제물로 올릴 정도로 관련 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막걸리는 많은 국민이 즐기고 향유하는 대중적인 술이다. 조선 시대까지 막걸리는 집집마다 가양주(家釀酒)로 빚어 집안 특유의 술맛을 유지해 왔으며, 김치, 된장과 같이 각 가정에서 직접 만들어 먹던 발효음식의 하나였다. 근대 이후 국가 정책의 흐름에 따라 가양주 대신 양조장 막걸리가 일반화되고 재료가 변화하기도 하였지만,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2000년대 이후에는 막걸리 열풍이 불면서, 자가 제조도 증가하는 추세다. * 가양주: 집에서 담근 술. 일제강점기에 주세법이 강화되면서 가양주는 밀주(密酒)로 단속의 대상이 됨. 1995년부터 자가 소비용으로 가양주를 제조하는 것이 다시 허용됨. 이처럼 ‘막걸리 빚기’는 무형문화재로서 역사성, 학술성, 대표성, 사회문화적 가치,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었다. 다만, ‘막걸리 빚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온 국민이 전승·향유하고 있는 문화라는 점에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는 인정하지 않고 종목으로만 지정하였다.
South Korea -
강릉단오제 (江陵端午祭)
강릉단오제는 2005년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으며, 2008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었다. 강릉단오제는 한국에서 가장 역사 깊은 축제 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 6.25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변화를 겪으면서도 강릉단오제는 영동 지역의 주민을 하나로 묶는 구심체 역할을 해왔으며, 오늘날에도 강릉단오제는 전통문화의 전승로이자 재창조의 장이 되고 있다. 강릉은 한반도의 옛 나라인 동예의 땅이다. 기록에 따르면 예국에서는 10월에 무천이라는 축제를 행하였는데 무천이 추수감사제라면 5월 단오제는 상대적으로 곡물의 성장 의례적 성격을 띠는 파종기 축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강릉단오제의 역사는 매우 깊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구체적 기록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추강 남효온의 『추강냉화(秋江冷話)』에는 매년 3, 4, 5월 중 택일하여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사흘 동안 음주 가무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사에는 태조 왕건이 신검을 토벌할 때 당시 강릉 지역의 호족이었던 왕순식에게 태조가 말하기를 “꿈에 이상한 중이 갑옷을 입은 병사 3천을 거느리고 온 것을 보았는데 다음날 그대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도와주니 이상한 일이다”라고 하였고, 또한 왕순식이 “제가 명주에서 출발할 때 대현에서 승사가 있어 제사를 지냈는데 대왕이 보신 꿈이 이것입니다”라고 하여 대관령 성황사의 오랜 역사를 짐작케 한다. 강릉단오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강릉 출신 허균이 남겼다. 허균은 강릉단오제를 직접 보고 기록을 남겼는데 제사를 받는 대상이 김유신 장군이라고 썼다. 김유신은 어려서 명주에 유학하여 무술을 익히고 삼국을 통일한 후 죽어서 대관령 산신이 되었고 이 신이 영험하여 해마다 5월이면 대관령에 가서 신을 맞이하여 즐겁게 해 준다고 기록하였다. 그래서 신이 즐거우면 그해는 풍년이 들고 노하면 천재지변을 주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명주 사람들이 모두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며 신을 섬겼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강릉단오제의 구체적인 역사는 알 수 없으나 강릉단오제가 예부터 민중 중심의 행사였으며 관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진 민관공동의 축제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도 강릉단오제의 중요 제의(祭儀)는 강릉시장을 비롯한 각급 기관장들이 제관직을 수행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강릉단오제는 상하가 함께 했던 고대 제의가 지닌 축제적 모습을 온전히 지닌 행사라고 할 수 있다. 강릉단오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 • 단오제의 절차 단오제의 행사는 음력 4월 5일 신주근양(神酒謹釀, 신에게 드릴 술을 담그는 일)부터 음력 5월 7일 송신제(送神祭, 신을 대관령으로 보내는 제사)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에서 펼쳐지는데, 제사의 대상은 대관령 산신(김유신장군으로 전해짐)과 국사성황신(國師城隍神, 범일국사(梵日國師)라고 전해짐)이며 단오제를 지내지 않으면 이 지역에 큰 재앙이 미친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단오제는 음력 4월 15일 대관령산신당에서 제사를 올리고 신목(神木)을 모시고 내려와 구산성황당(邱山城隍堂)을 거쳐 홍제동에 있는 국사여성황당에 모셨다가 행사 전날인 음력 5월 3일 저녁 영신제(迎神祭)를 지내고 위패를 남대천 백사장에 마련된 제단에 옮겨 모심으로 강릉단오제의 서막이 시작된다. 단오장에서는 5일간 아침마다 제를 올리고 굿을 하며 풍농, 풍어 등을 기원하며 모두 한마음이 되어 제를 올린다. 그밖에 관노가면극, 그네, 씨름, 농악경연대회, 농요경창대회 등 수많은 민속놀이와 다양한 행사가 개최된다.
South Korea 2008 -
학연화대합설무 (鶴蓮花臺合設舞)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학연화대합설무는 조선 전기 궁중에서 악귀를 쫓기 위해 베풀던 의식 다음에 학무와 연화대무를 연이어 공연하는 종합적인 춤을 말한다. 학연화대합설무는 학모습의 탈을 쓰고 추는 학무와 연꽃에서 동기(童妓)가 태어나는 연화대무로 구성된다. 학연화대합설무는 동물과 인간과의 교감세계를 표현한 독특한 춤으로 예술성이 높고,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 오랜 역사성과 전통성을 간직하고 있다. 학무는 임금을 송축하기 위해 학탈을 쓰고 추는 춤으로 고려때부터 궁중의례에서 행해 왔으며, 새의 탈을 쓰고 추는 춤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연화대무는 두 여자 아이가 연꽃술로 태어났다가 왕의 덕망에 감격하여 춤과 노래로써 그 은혜에 보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온몸에 학의 탈을 쓴 두 무용수가 춤을 추다가 미리 설치된 꽃봉우리 두 개를 부리로 쪼면, 연꽃이 벌어지며 여자 아이가 튀어나오고 학은 놀라서 뛰어 나간다. 그 후 두 여자아이가 추는 춤이 연화대무이다. 공연상 두 춤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오랜 세월 전승되어 왔다. 반주음악으로는 세령산, 삼현도드리, 타령이 학춤을 출 때 사용되며, 연화대무에서는 궁중음악만을 사용한다.
South Korea -
소반장 (小盤匠)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소반(小盤)이란 음식을 담은 그릇을 올려 놓는 작은 상으로, 한국의 식생활에서 부터 제사의례에 이르기까지 여러 용도로 쓰이는 부엌가구이다. 소반을 만드는 기술 또는 그 장인(匠人)을 소반장이라 한다. 고구려 각저총·무용총 등의 고분벽화에는 여러 유형의 소반이 나타나고 있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 『별사 (別賜)』, 『경국대전 (經國大典)』등의 기록에 의하면 국가에 소속된 상을 만드는 기관이 분업화되어 생산을 담당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이념의 영향으로 겸상보다는 독상이 주로 사용되었고, 제례·혼례 등 크고 작은 많은 행사들로 인하여 여러 용도의 상이 필요하게 되어 자연히 소반제작이 발달하게 되었다. 소반의 종류는 산지·형태·용도에 따라 약 60여종으로 분류된다. 크게 해주반, 나주반, 통영반, 충주반, 강원반 등으로 구분되는데 해주반은 조각 위주의 소반, 나주반은 중대(中帶) 위주의 소반, 통영반은 운각(雲脚) 위주의 소반이다. 또한 다리모양에 있어서도 경상도는 죽절형(竹節形 : 대나무마디 모양), 전라도는 호족형(虎足形 : 호랑이발 모양), 강원도·경기도는 구족형(狗足形 : 개발 모양)이 주로 나타난다.
South Korea -
궁중채화 (宮中綵花)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궁중채화’는 전문적인 장인이 궁중의 연희나 의례 목적에 맞게 비단, 모시 등으로 제작한 꽃으로 궁중에서 존중의 뜻을 표현하거나, 평화·장수·건강 등의 상징으로 꽃을 이용한 궁중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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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큰굿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제주큰굿’은 제주지역에서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굿으로, 그 안에 음악·춤·놀이 등이 한데 어우러지고 지역민의 살아온 내력이 온전히 담겨있는 종합적 형태의 무속의례이다. 의례는 보통 큰 심방을 포함하여 5명 이상으로 구성하여 짧게는 7일에서 길게는 대략 보름 정도 진행한다. ‘제주큰굿’은 오랜 역사적 내력을 지니고 있고, 우리나라 굿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으며, 제주지역 음악·춤·구비서사시·놀이 등을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또한, 수많은 신(神)들을 초대하여 제청(祭廳)에 앉히는 의식부터 시작하여, 영신(迎神)-오신(娛神)-송신(送神)의 완벽한 제의적 형식미를 갖추고 있는 점, 열두본풀이로 전해지는 서사무가(敍事巫歌)에는 제주도 사람들의 천지창조·삶·죽음 등에 대한 관념들이 투영되어 지역민의 세계관을 온전히 확인할 수 있는 점, 사설은 과거 ‘제주 방언’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살아있는 제주방언 사전이라고 할 정도로 언어학적으로 중요한 문화자산인 점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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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사 수륙재 (津寬寺 水陸齋)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수륙재(水陸齋)’는 온 천지와 수륙에 존재하는 모든 고혼(孤魂)의 천도를 위하여 지내는 의례로 개인 천도의 성격을 띤 영산재에 비해 공익성이 두드러지는 불교 의례이다. 조선초기부터 국행 수륙재로서 대규모로 설행되어 왔던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문헌에 나타나 있다. 서울 진관사는 조선시대에 왕실 주도의 대규모 수륙재를 주로 담당하였던 중심 사찰이었으며 의식, 설단, 장엄 등 수륙재의 여러 분야에 대한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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