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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 (處容舞)
처용무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처용무란 동서남북과 중앙의 5방에서 5명의 무용수가 춤을 추는 궁중 무용을 일컫는다. 때문에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국의 궁중 무용으로는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탈을 쓰고 춤을 춘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1971년 1월 8일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처용무는 남자 무용수들이 연행(演行)하는 장엄하면서도 신비로운 춤이다. 통일신라 말기(B.C. 57년~A.D. 935년), 헌강왕(憲康王)이 행차하여 한반도 남동쪽 울산시 인근 개운포(開雲浦, 오늘날의 황성동 세죽마을)에 이르렀다. 왕이 환궁 차비를 하였을 때 짙은 운무(雲霧)가 낀 하늘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좌우에 그 이유를 물으니, 일관(日官)이 “이는 동해(東海)의 용(龍)이 부리는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이를 풀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왕이 근처에 용을 위한 절을 짓게 하자, 먹구름이 걷히고 동해 위로 용이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솟아올라 춤을 추었다. 그 중 ‘처용(處容)’이라는 이름의 한 아들이 헌강왕을 따라 수도인 경주로 와서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관직을 얻어 머물렀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처용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역신이 그의 아내를 범하려 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처용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자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어 무릎을 꿇고 앉아 사과하였다. 이때부터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대문에 붙여 악귀를 몰아내고 상서로운 기운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고려 왕조 후기(918년~1392년)까지 처용무는 무용수 1인이 공연하였으나, 조선 왕조 세종(재위 1418년~1450년) 때에 이르러 무용수 5명이 춤을 추게 되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따르면 음력 섣달그믐날, 묵은해의 역신과 사귀를 쫓기 위해 행하는 나례 의식에서 두 차례에 걸쳐 처용무를 추었다고 한다. 5명의 무용수는 각각 서쪽·동쪽·북쪽·남쪽·중앙의 오방(五方)을 상징하는 흰색·파란색·검은색·붉은색·노란색의 의상을 입었다. 처용무에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근거하여 악운을 쫓는 의미가 담겨 있어 장엄하고 활기찬 춤사위에서 씩씩하고 호방한 기운을 엿볼 수 있다. 처용무는 수제천(壽齊天, ‘하늘만큼 영원한 생명’) 음악에 맞추어 왕을 향해 나아가 “신라성대소성대(新羅盛代昭盛代, ‘밝고 번성한 시대, 신라’)”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처용가〉의 첫 수를 ‘언락(言樂)’이라는 서정적인 가락에 맞추어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무용수들은 왕을 향해 인사하고 향당교주(鄕唐交奏,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번갈아 연주)에 맞추어 무대 중앙으로 나아간다. 세영산(細靈山)의 느린 가락에 맞추어 무용수들은 정방형을 이루며 산작화무(散作花舞, ‘꽃의 형태로 흩어짐’)를 춘 후 오른쪽으로 돈다. 십자형으로 대열이 바뀌면 음악도 삼현도드리(3개 현악기로 연주하는 느린 6/4 박자 음악)로 변경된다. 수양수무(垂揚手舞, ‘팔을 들어 올려 흔들며 추는 춤’)와 무릎디피무(‘무릎을 움직여 방향을 바꾸는 춤’)을 마친 후 5인의 무용수는 대열을 원형으로 바꾸고 왼쪽으로 돈다. 다시 한 번 일렬로 대열을 바꾸고 나서 무용수들은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 ‘머나먼 산 또는 평야로’)’으로 시작하는 〈처용가〉를 다시 가곡 우편(羽編) 가락에 맞추어 부른 후 송구여지곡(頌九如之曲, 도드리의 일종)에 맞추어 낙화유수(落花流水, ‘떨어지는 꽃잎과 흐르는 물’)를 추며 무대에서 퇴장한다. 처용 탈은 팥죽색 피부에 치아가 하얗고, 납 구슬을 단 주석 귀고리가 달려 있다. 검은색 사모에는 모란 2송이와 복숭아 열매 7개를 꽂아 장식한다. 팥죽색과 복숭아 열매는 벽사(辟邪, 잡귀를 물리침)를, 하얀 모란은 진경(進慶, 기뻐할만한 일로 나아감)을 상징한다.
South Korea 2009 -
강릉단오제 (江陵端午祭)
강릉단오제는 2005년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으며, 2008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었다. 강릉단오제는 한국에서 가장 역사 깊은 축제 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 6.25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변화를 겪으면서도 강릉단오제는 영동 지역의 주민을 하나로 묶는 구심체 역할을 해왔으며, 오늘날에도 강릉단오제는 전통문화의 전승로이자 재창조의 장이 되고 있다. 강릉은 한반도의 옛 나라인 동예의 땅이다. 기록에 따르면 예국에서는 10월에 무천이라는 축제를 행하였는데 무천이 추수감사제라면 5월 단오제는 상대적으로 곡물의 성장 의례적 성격을 띠는 파종기 축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강릉단오제의 역사는 매우 깊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구체적 기록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추강 남효온의 『추강냉화(秋江冷話)』에는 매년 3, 4, 5월 중 택일하여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사흘 동안 음주 가무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사에는 태조 왕건이 신검을 토벌할 때 당시 강릉 지역의 호족이었던 왕순식에게 태조가 말하기를 “꿈에 이상한 중이 갑옷을 입은 병사 3천을 거느리고 온 것을 보았는데 다음날 그대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도와주니 이상한 일이다”라고 하였고, 또한 왕순식이 “제가 명주에서 출발할 때 대현에서 승사가 있어 제사를 지냈는데 대왕이 보신 꿈이 이것입니다”라고 하여 대관령 성황사의 오랜 역사를 짐작케 한다. 강릉단오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강릉 출신 허균이 남겼다. 허균은 강릉단오제를 직접 보고 기록을 남겼는데 제사를 받는 대상이 김유신 장군이라고 썼다. 김유신은 어려서 명주에 유학하여 무술을 익히고 삼국을 통일한 후 죽어서 대관령 산신이 되었고 이 신이 영험하여 해마다 5월이면 대관령에 가서 신을 맞이하여 즐겁게 해 준다고 기록하였다. 그래서 신이 즐거우면 그해는 풍년이 들고 노하면 천재지변을 주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명주 사람들이 모두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며 신을 섬겼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강릉단오제의 구체적인 역사는 알 수 없으나 강릉단오제가 예부터 민중 중심의 행사였으며 관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진 민관공동의 축제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도 강릉단오제의 중요 제의(祭儀)는 강릉시장을 비롯한 각급 기관장들이 제관직을 수행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강릉단오제는 상하가 함께 했던 고대 제의가 지닌 축제적 모습을 온전히 지닌 행사라고 할 수 있다. 강릉단오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 • 단오제의 절차 단오제의 행사는 음력 4월 5일 신주근양(神酒謹釀, 신에게 드릴 술을 담그는 일)부터 음력 5월 7일 송신제(送神祭, 신을 대관령으로 보내는 제사)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에서 펼쳐지는데, 제사의 대상은 대관령 산신(김유신장군으로 전해짐)과 국사성황신(國師城隍神, 범일국사(梵日國師)라고 전해짐)이며 단오제를 지내지 않으면 이 지역에 큰 재앙이 미친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단오제는 음력 4월 15일 대관령산신당에서 제사를 올리고 신목(神木)을 모시고 내려와 구산성황당(邱山城隍堂)을 거쳐 홍제동에 있는 국사여성황당에 모셨다가 행사 전날인 음력 5월 3일 저녁 영신제(迎神祭)를 지내고 위패를 남대천 백사장에 마련된 제단에 옮겨 모심으로 강릉단오제의 서막이 시작된다. 단오장에서는 5일간 아침마다 제를 올리고 굿을 하며 풍농, 풍어 등을 기원하며 모두 한마음이 되어 제를 올린다. 그밖에 관노가면극, 그네, 씨름, 농악경연대회, 농요경창대회 등 수많은 민속놀이와 다양한 행사가 개최된다.
South Korea 2008 -
하회별신굿탈놀이 (河回別神굿탈놀이)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별신굿이란 3년, 5년 혹은 10년마다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한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는 약 500년 전부터 10년에 한번 섣달 보름날(12월 15일)이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무진생(戊辰生) 성황님에게 별신굿을 해왔으며 굿과 더불어 성황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놀이를 하였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각시의 무동마당·주지마당·백정마당·할미마당·파계승마당·양반과 선비마당·혼례마당·신방마당의 8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 대내림을 하는데, 정월 초이튿날 아침 성황당에 올라가 당방울이 달린 내림대를 잡고 성황신을 내리면 당방울을 성황대에 옮겨 달고 산에서 내려온다. 성황대와 내림대를 동사 처마에 기대어 세우면 비로소 놀이가 시작된다. 등장인물로는 주지승·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등이 있다. 파계승에 대한 비웃음과 양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해학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제사의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각시탈은 성황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 외에는 볼 수 없고, 부득이 꺼내볼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 놀이에 사용되는 탈은 주지탈 등을 포함하여 모두 10종 11개로 오리나무로 만들었으며 옻칠과 안료를 두세겹 칠하여 색조의 강도를 높였는데, 원본은 1964년 하회탈 및 병산탈로 지정되었다. 탈놀이의 반주는 꽹과리가 중심이 되는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진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탈을 태우며 즐기는 뒷풀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며, 우리나라 가면극의 발생과 기원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South Korea -
영산쇠머리대기 (靈山쇠머리대기)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영산쇠머리대기는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서 대보름축제를 배경으로 전승해온 대동놀이이다. 영산쇠머리대기는 나무로 엮어 만든 소를 어깨에 메고 맞부딪쳐서 상대방의 쇠머리를 쓰러뜨려 승패를 가르는 집단놀이이다. 영산쇠머리대기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영산의 영축산과 작약산(함박산)의 형상이 마치 두 마리의 황소가 겨루고 있는 것 같다 해서 산의 나쁜 기운을 풀어주고, 불행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영산쇠머리대기는 일종의 편싸움 놀이로, 마을을 동·서로 갈라 두 패로 편을 짜는데 이긴 편 마을에는 풍년이 들고 진 편 마을에는 흉년이 든다고 해서 농경의식의 하나로 전해져 왔다. 영산지방에서는 나무쇠싸움 목우전(木牛戰)이라는 이름으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민속놀이였으나 현재는 3·1문화제 행사의 하나로 줄다리기와 함께 행해지고 있다. 대보름이 다가오면 산신에게 고사를 지내고 나무를 길이 약 10m 정도로 베어온다. 통나무 3개를 세워 위를 하나로 묶고 아래 발은 넓게 펴 큰 통나무에 고정시켜 넘어지지 않도록 한다. 세운 나무 중간에 나무를 가로로 대고 튼튼하게 묶어 사람이 잡고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한다. 나무쇠 밑바닥에는 통나무를 가로, 세로 5∼6개씩 대고 엮어 땅에 놓아도 안정적이면서 싸울 때 메기 좋도록 한다. 앞에 세운 통나무 부분에 소머리 모형을 깎아 세우거나 가면을 만들어 세운다. 나무쇠를 메고 싸움터로 나가기 전에 동서 양편에서는 농악을 치고 깃발을 흔들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쇠머리 위에서는 대장, 중장, 소장 세 사람이 올라타고 지휘를 하는데, 사람들은 대장의 지휘에 따라 힘차고 민첩하게 행동해야만 승리할 수가 있다. 상대방의 쇠머리를 쓰러뜨리거나 자기 편의 쇠머리로 상대방의 쇠머리 위를 덮쳐 땅에 닿게 하면 이기게 된다. 영산쇠머리대기는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공동체의 민속놀이이며, 영산지방에서 생겨나 영산지방에서만 전승되어 오는 독특한 놀이이다.
South Korea
ICH Materials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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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타이족과 응오족의 사자춤(상호소통용 작은 원숭이 가면)
베트남 국가무형유산목록 등재(2017)\n베트남 랑선시의 타이족과 응오족의 사자춤은 보통 새해 축제에서 공연된다. 사자탈을 쓴 마을 사람들은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고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 사자춤을 연행한다. 이 사자춤은 국경 지역 민족 간의 이주와 문화 교류를 거치며 지역 문화 요소, 전통 무술, 민속무용을 결합하여 타이족과 응오족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이 되었다. 사자춤은 보통 12명에서 14명의 공연자들로 구성되며 사자춤, 무술춤, 곡예, 원숭이춤 등을 추거나 북, 심벌즈, 징 등의 악기를 연주한다. 이 사자춤은 공동체의 결속과 자연 환경과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촉진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가치를 표현한다.
Viet Nam -
베트남, 타이족과 응오족의 사자춤(상호소통용 작은 원숭이 가면)
베트남 국가무형유산목록 등재(2017)\n베트남 랑선시의 타이족과 응오족의 사자춤은 보통 새해 축제에서 공연된다. 사자탈을 쓴 마을 사람들은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고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 사자춤을 연행한다. 이 사자춤은 국경 지역 민족 간의 이주와 문화 교류를 거치며 지역 문화 요소, 전통 무술, 민속무용을 결합하여 타이족과 응오족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이 되었다. 사자춤은 보통 12명에서 14명의 공연자들로 구성되며 사자춤, 무술춤, 곡예, 원숭이춤 등을 추거나 북, 심벌즈, 징 등의 악기를 연주한다. 이 사자춤은 공동체의 결속과 자연 환경과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촉진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가치를 표현한다.
Viet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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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 압사라
압사라 춤은 크메르 전통무용, 크메르 황실발레 등으로도 불리며, 2008 유네스코 무형유산목록에는 ‘캄보디아 왕실무용(The Royal Ballet of Cambodia)’이라는 명칭으로 등재되었다. 압사라 춤은 앙코르 와트의 회랑 벽면에 새겨진 압사라 부조의 이미지를 따라 만들어진 춤이다. 부조 속에는 저마다 다른 표정과 동작을 하고 있는 수 천 개의 압사라들이 있는데, 이를 연속 동작으로 보면 한 편의 춤사위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압사라’는 산스크리트어로 힌두교와 불교 신화에 나오는 구름과 물의 여자 요정을 뜻하며, 흔히 ‘천상의 무희’ 혹은 ‘춤추는 여신’이라는 의미로도 알려져 있다.\n\n원래 압사라 춤은 고대 캄보디아 왕실에서만 공연되었다. 무용수들은 신과 조상에게 파견된 왕의 전령으로 여겨졌고, 천상의 존재를 표현하는 신성한 임무를 지닌 존재였던 무용수들은 결혼이 금지된 채 왕궁에서만 살아야 했다.\n\n압사라 춤은 황금빛의 신비로운 의상과 정교한 분장, 그리고 우아하며 느린 동작이 특징이다. 특히 손동작은 앙코르와트 부조 벽화 속 압사라 무희들의 손 모양과 일치하는데, 섬세하고 화려한 손동작 하나하나에는 신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 담겨 있다. 무용수들은 유려한 몸짓과 자세를 통해 공포와 분노, 사랑과 환멸에 이르는 폭넓은 감정을 표현한다. 압사라 춤의 손동작은 습득하기 어려워 수 년 간 고된 훈련을 통해 숙련된 무용수들만이 소화할 수 있다.\n\n전통적으로 압사라 춤에는 네앙(Neang, 여성), 네아이롱(Neayrong, 남성), 예악(Yeak, rjdls), 스바(Sva, 원숭이)의 네 가지 인물 유형이 등장한다. 각 등장 인믈은 고유한 색상과 분장, 가면으로 구분한다. 음악은 전통 악단과 여성 합창단이 이끈다.\n\n압사라 춤은 1천 년 이상 크메르 왕실의 대관식, 혼례식, 장례식, 경축일 등 각종 행사와 의식에서 널리 연행되었다. 크메르 민족의 기원과 전설을 춤으로 재연하는 압사라 춤은 캄보디아 인들에게 문화의 상징으로서 오랜 세월 동안 존중 받았다. 하지만 1960년 대 이후 크메르 루즈의 폭정 하에 거의 모든 명인급 무용수들과 악사들이 희생되면서 사실상 명맥이 끊어졌다가 1979년 폴 포트 정권이 붕괴한 직후 극적으로 부활했다. 현재는 과거의 영화를 많이 회복하였으나 공적인 지원 부족, 공연 공간 확보의 어려움, 대중문화와의 경쟁, 관광상품으로 전락하는 위기를 겪는 등 많은 난관에 직면하고 있다.\n\n출연자: 류 시브멩(Leu Sivmeng), 렝 스레이펜(leng Sreypenh), 피치 락스메이(Pich Raksmey)\n예술감독: 욘 소콘(Yon Sokhorn)
Cambodia Sep 2, 2015 -
카타칼리-닥샤야감
카타칼리는 17세기 인도 남서부 케랄라 주에서 유래한 전통 예술로 600 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춤, 연극, 음악, 분장과 의상 등이 긴밀하게 결합된 가무악 총체극으로, 바라타나티얌과 마찬가지로 연희자가 시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읊고 춤과 연기로 표현하는 종교적인 연희 양식의 춤이다. 인도 예술에 있어 영감의 뿌리인 대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 라마야나(Ramayana), 샤비나(Shaiva)의 전통적인 이야기를 주제로 삼는다. 인도춤 미학의 핵심인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일체감, 즉 라사의 구현을 목적으로 한다. 카타칼리 공연은 야외 무대에서 저녁 6시에 시작해 다음 날 아침까지 밤을 새워 이어진다. 강한 체력과 정신력이 요구되는 만큼 혹독한 수련을 거친 무용수만이 무대에 오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소년과 남자들이 추었으며, 남자 무용수가 여성의 역할까지 소화했다.\n\n카타칼리는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로 관객을 압도한다. 판달(Pandal) 이라고 불리는 무대는 꽃과 잎으로 장식한다. 유일한 조명은 크고 거대한 금속 램프의 불빛뿐이다. 무용수는 20kg이 넘는 원색의 전통 의상을 입고 얼굴에는 마치 가면처럼 보이는 특수한 분장을 하며, 키의 절반 길이가 넘는 큰 왕관을 쓴다. 육중한 의상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고 날렵한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경탄을 자아낸다. 음악은 케랄라 주의 전통 악기인 첸다(Chenda, 원통형의 퍼쿠션)와 마탈람(Maddalam, 잭 푸르트 나무로 만든 양면 드럼) 두 타악기가 이끈다. 첸다는 높고 격렬한 음색으로 남성적인 느낌을, 마탈람은 다채롭고 부드러운 음색으로 여성적인 감정을 표현한다. 인도 4대 전통 무용 중 하나로 꼽히는 카타칼리는 천 년 전의 벽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무렵까지 왕실에서만 공연하는 고급 문화였으나 최근에는 일반 대중들도 즐긴다.\n\n이 작품은 카타칼리 중 닥샤 야감(Daksha Yaagam)을 모티브로 하는 공연이다. 닥샤야감은 인도 고대 서사시에 등장하는 시바신, 사티, 사티의 아버지, 닥샤 왕에 얽힌 이야기이다. 닥샤의 딸 사티는 자신의 아버지가 신께 제사를 바치기 위해 성대하게 벌인 야감에서 남편인 시바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존중받지 못하고 모욕을 당하자 그 분노를 참지 못하고,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를 알게 된 시바신이 광폭한 분노에 휩싸이면서 파괴의 여신과 그 졸개가 탄생했다. 닥샤의 야감을 파괴한 후 시바신은 파괴의 춤을 추었고, 이것이 인도 춤의 모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n\n인도 정부가 인정한 8대 전통춤이다.\n\n출연자: 칼라일꿀랑카라 카타칼리재단\n안무가: P.N.Ventikattaraman
India Sep 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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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태무형문화유산꾸리에 한국어판 VOL.2 (무형문화유산과 노동)
유네스코아태무형유산센터는 아태지역 무형유산에 대한 계간지인 ICH 꾸리에를 2009년부터 발간해 오고 있습니다. \n\n「Windows to ICH」라는 제목으로, 각 호마다 테마를 가지고 있으며, 제2권의 테마는 「무형문화유산과 노동」입니다.
South Korea 2009 -
아태무형문화유산꾸리에 한국어판 VOL.20 (아시아의 다양한 전통 줄다리기)
유네스코아태무형유산센터는 아태지역 무형유산에 대한 계간지인 ICH 꾸리에를 2009년부터 발간해 오고 있습니다. \n\n「Windows to ICH」라는 제목으로, 각 호마다 테마를 가지고 있으며, 제20권의 테마는 「아시아의 다양한 전통 줄다리기」입니다.
South Korea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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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차정부간위원회 특집 자연의 섬 ‘제주’와 ‘제주인’의 지혜제주도를 처음 온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것이 있다. 바로 검은 돌이다. 제주는 화산섬으로 온통 돌투성이다. 화산이 분출하면서 내뿜은 화산탄들이 흩어져 제주의 모든 땅들을 뒤덮고 있다. 지금도 밭에 가면 흔하게 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농사를 짓기가 어렵다. 하지만 13세기부터 제주 사람들은 밭에 흩어진 쓸모없는 돌들을 모아 밭의 경계에 돌담을 두르고 경작지를 확보하였다. 현재 그 길이가 22,100Km에 이른다.\n\n이 돌들은 얼기설기 쌓여 있어 대충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는 제주인의 지혜가 숨어있다. 그 열쇠는 바로 바람이다. 제주는 여름에 불어오는 태풍은 물론이고 4계절 내내 강한 바람이 분다. 빈틈 없이 촘촘히 돌담을 쌓는다면 제주 사람들은 매일 들에 나가 넘어진 돌을 다시 쌓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구멍이 난 울퉁불퉁한 제주의 돌담은 바람의 힘을 떨어뜨리고 통과시킨다. 삶에서 얻은 지혜이다.\n\n제주의 옛 이름은 ‘탐라’이다. 탐라의 시작과 관련된 이야기로는 땅에서 솟아난 세 신인(神人)이 탐라를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이곳은 성스럽게 여겨져 ‘삼성혈’이라 불린다. 이는 한국 본토의 고대 건국신화가 하늘에서 알로 태어난 것과는 달리 땅에서 솟아난 것으로 문화적 원형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이다.\n\n제주도에는 1만8천의 신이 있다. 제주도민들은 세상 모든 것에 신이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제주의 거친 자연환경에서 비롯된다. 쉴 새 없이 불어오는 거친 바람과 물이 고이지 않는 척박한 화산 땅은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 힘든 환경이었다. 그래도 살아야 했던 제주도민들은 거친 자연환경에 순응하며 살기 위해 신을 찾았던 것이다.\n\n제주의 마을에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신들의 거처인 ‘본향당’들이 있다. 이곳엔 ‘심방’이라 불리는 무당이 있다. 이들은 제주민들을 신과 연결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특히 거친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왔던 해녀들과 어부들을 위해 음력 2월 영등굿이 진행된다. 영등신은 바람의 신으로 파도를 일으키기 때문에 해녀들과 어부들에겐 바다의 안전을 위해 중요한 신이다.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제주칠머리당 영등굿’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제주도에서는 이 기간 동안 30여 곳에서 바다의 신을 위한 의례를 펼친다.\n\n제주에는 여신과 관련한 이야기가 많다. 이들은 다른 나라의 여신과 달리 남신들에게 기대거나 속박되지 않는다. 거대한 거인으로 치마폭에 흙을 날라 제주 섬을 만들었다는 ‘설문대할망’, 생명을 잉태시키는 ‘삼승할망’, 농업을 관장하는 ‘자청비’ 등 주체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제주여성들의 모습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유교의 영향으로 동아시아에 나타나는 남자 중심의 사회와는 달리 제주도의 여성들은 자존감이 매우 높다. 경제활동도 한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편이다.\n\n그 대표적인 것이 제주해녀이다. 작년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개최된 11차 정부간위원회에서 유네스코 대표목록으로 등재된 ‘제주해녀문화’는 역사적으로 이어져온 여성 중심의 사회를 통해 나타난 것이다. 화산섬으로 물이 고이지 않아 벼농사를 짓지 못하는 제주도에서 땅이 아닌 바다에서 먹을거리를 찾아야 했던 여성들은 생계를 위해 해녀가 되었으며 혼자가 아닌 다 같이 살아가는 법을 익혔다.\n\n제주의 자연은 척박하며 사람이 살아가기엔 모자란 땅이다. 하지만 제주 사람들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이를 이용하여 살아왔다. 그 곳엔 1만8천의 신들이 있고 이웃이 있다. 이것이 제주문화를 지금까지 이어온 힘이다.\n\n사진 : Jeju haenyeo (female divers) crossing low stone walls to get to the sea © Jeju Haenyeo MuseumYear2017Nation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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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Cham): 매혹적인 불교 가면 춤참(cham)은 불교 사원의 승려들이 강렬한 색상의 옷과 매혹적인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이다. 참은 네팔, 부탄, 티베트, 인도의 다양한 불교 사원에서 행해지며, 네팔에서는 라마춤(Lama dance)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불교 사원의 계보와 장소에 따라 연행하는 참의 종류는 다양하다. 다른 여러 탈춤이나 의례와 마찬가지로, 참도 달의 위상 변화에 따라 연행된다.\n\n티베트에서 처음 시작된 참은 본교(Bon)와 주술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참은 질병을 퇴치하며 공동체와 마을의 액을 막고 풍년을 가져온다고 한다. 티베트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진 후 왕이 불교 사원을 짓고자 했으나 본교의 정령들이 이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스와트(Swat) 지역에 해당하는 우디야나(Uddiyana) 출신의 파드마삼바바(Padmasamvaba)라고 하는 유명한 탄트라 불교 승려가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승려는 그 지역을 떠돌며 불교 사원 건설에 훼방을 놓던 본교 정령들을 달래기 위해 바즈라킬라야(Vajrakilaya)라는 참을 연행했다. 그가 정령들의 방해를 없애고 나서, 706년 티베트에 불교 사원이 지어졌다. 현재 참은 네 개의 티베트 불교종파(닝마(Nyingma), 사키아(Sakya), 카규(Kagyu), 겔룩(Gelug))의 의식에서 모두 연행되고 있다.\n\n파드마삼바바가 참을 처음 연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후 참의 발전에는 많은 종교 지도자들의 기여가 있었다. 춤의 발전에 관한 여러 이야기에 의하면, 승려들이 꿈에서 본 춤의 안무를 모두 외워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스승과 제자 간 지식의 전승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달라이 라마도 참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제5대 달라이 라마(Gyalwa Lobsang Gyatso, 1618-1682)가 그 중 하나로, 종교적 춤에 관한 책(Chams Yig)에서 참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티베트 불교의 중심이 된 포탈라궁(Potala Palace)을 건설했다. 제13대 달라이 라마(Thupten Gyatso, 1876-1933)는 영국의 티베트 침략 당시 몽골로 피신했고 이곳에서 생생한 꿈들을 꾸게 된다. 그는 꿈을 바탕으로 ‘몽골에서 온 백인’이라는 참을 만들었다. 오늘날 티베트 불교가 세계적으로 전파되면서 참도 함께 널리 확산됐다. 불교종파는 물론 창작시기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참이 존재한다.\n\n불교 사원의 출가 승려만이 참을 연행할 수 있다. 수 주에 걸쳐 계율을 받은 승려들은 춤을 연습하고 관련된 의식을 치르게 된다. 춤의 종류에 따라 가면과 옷을 차려 입기도 한다. 참은 다양한 인물을 상징하며, 대부분 1) 티베트 신들의 신, 2) 여신 또는 여성 마술사, 3) 일반 신, 4) 수호신 마하칼라(Mahakala), 5) 광대와 재담꾼(stsara), 6) 신화적 인물, 또는 7) 인간을 묘사한다. 참은 신이 악령을 이겨내는 정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참은 비밀리에 치뤄졌는데, 지금은 공개적으로 행해지고 있다.\n\n참을 연행할 때는 다양한 악기를 이용하여 종교적이거나 상징적인 음악을 연주한다. 심지어 사람의 넓적다리뼈를 악기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생자필멸과 무상을 일깨워준다. 티베트 종교의식에서 음악과 춤은 항상 깨달음을 주기 위한 역할을 한다.\n\n사진 1 : 카트만두 보우다 세첸사원 승려들의 참 연행 ⓒ 세첸 사원(Shechen Monastery)\n사진 2 : 카트만두 보우다 세첸사원 승려들의 참 연행 ⓒ 세첸 사원(Shechen Monastery)Year2019NationSouthwest Asia,Bhutan,India,Nep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