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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 (處容舞)
처용무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처용무란 동서남북과 중앙의 5방에서 5명의 무용수가 춤을 추는 궁중 무용을 일컫는다. 때문에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국의 궁중 무용으로는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탈을 쓰고 춤을 춘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1971년 1월 8일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처용무는 남자 무용수들이 연행(演行)하는 장엄하면서도 신비로운 춤이다. 통일신라 말기(B.C. 57년~A.D. 935년), 헌강왕(憲康王)이 행차하여 한반도 남동쪽 울산시 인근 개운포(開雲浦, 오늘날의 황성동 세죽마을)에 이르렀다. 왕이 환궁 차비를 하였을 때 짙은 운무(雲霧)가 낀 하늘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좌우에 그 이유를 물으니, 일관(日官)이 “이는 동해(東海)의 용(龍)이 부리는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이를 풀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왕이 근처에 용을 위한 절을 짓게 하자, 먹구름이 걷히고 동해 위로 용이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솟아올라 춤을 추었다. 그 중 ‘처용(處容)’이라는 이름의 한 아들이 헌강왕을 따라 수도인 경주로 와서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관직을 얻어 머물렀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처용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역신이 그의 아내를 범하려 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처용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자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어 무릎을 꿇고 앉아 사과하였다. 이때부터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대문에 붙여 악귀를 몰아내고 상서로운 기운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고려 왕조 후기(918년~1392년)까지 처용무는 무용수 1인이 공연하였으나, 조선 왕조 세종(재위 1418년~1450년) 때에 이르러 무용수 5명이 춤을 추게 되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따르면 음력 섣달그믐날, 묵은해의 역신과 사귀를 쫓기 위해 행하는 나례 의식에서 두 차례에 걸쳐 처용무를 추었다고 한다. 5명의 무용수는 각각 서쪽·동쪽·북쪽·남쪽·중앙의 오방(五方)을 상징하는 흰색·파란색·검은색·붉은색·노란색의 의상을 입었다. 처용무에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근거하여 악운을 쫓는 의미가 담겨 있어 장엄하고 활기찬 춤사위에서 씩씩하고 호방한 기운을 엿볼 수 있다. 처용무는 수제천(壽齊天, ‘하늘만큼 영원한 생명’) 음악에 맞추어 왕을 향해 나아가 “신라성대소성대(新羅盛代昭盛代, ‘밝고 번성한 시대, 신라’)”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처용가〉의 첫 수를 ‘언락(言樂)’이라는 서정적인 가락에 맞추어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무용수들은 왕을 향해 인사하고 향당교주(鄕唐交奏,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번갈아 연주)에 맞추어 무대 중앙으로 나아간다. 세영산(細靈山)의 느린 가락에 맞추어 무용수들은 정방형을 이루며 산작화무(散作花舞, ‘꽃의 형태로 흩어짐’)를 춘 후 오른쪽으로 돈다. 십자형으로 대열이 바뀌면 음악도 삼현도드리(3개 현악기로 연주하는 느린 6/4 박자 음악)로 변경된다. 수양수무(垂揚手舞, ‘팔을 들어 올려 흔들며 추는 춤’)와 무릎디피무(‘무릎을 움직여 방향을 바꾸는 춤’)을 마친 후 5인의 무용수는 대열을 원형으로 바꾸고 왼쪽으로 돈다. 다시 한 번 일렬로 대열을 바꾸고 나서 무용수들은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 ‘머나먼 산 또는 평야로’)’으로 시작하는 〈처용가〉를 다시 가곡 우편(羽編) 가락에 맞추어 부른 후 송구여지곡(頌九如之曲, 도드리의 일종)에 맞추어 낙화유수(落花流水, ‘떨어지는 꽃잎과 흐르는 물’)를 추며 무대에서 퇴장한다. 처용 탈은 팥죽색 피부에 치아가 하얗고, 납 구슬을 단 주석 귀고리가 달려 있다. 검은색 사모에는 모란 2송이와 복숭아 열매 7개를 꽂아 장식한다. 팥죽색과 복숭아 열매는 벽사(辟邪, 잡귀를 물리침)를, 하얀 모란은 진경(進慶, 기뻐할만한 일로 나아감)을 상징한다.
South Korea 2009 -
강릉단오제 (江陵端午祭)
강릉단오제는 2005년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으며, 2008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었다. 강릉단오제는 한국에서 가장 역사 깊은 축제 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 6.25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변화를 겪으면서도 강릉단오제는 영동 지역의 주민을 하나로 묶는 구심체 역할을 해왔으며, 오늘날에도 강릉단오제는 전통문화의 전승로이자 재창조의 장이 되고 있다. 강릉은 한반도의 옛 나라인 동예의 땅이다. 기록에 따르면 예국에서는 10월에 무천이라는 축제를 행하였는데 무천이 추수감사제라면 5월 단오제는 상대적으로 곡물의 성장 의례적 성격을 띠는 파종기 축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강릉단오제의 역사는 매우 깊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구체적 기록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추강 남효온의 『추강냉화(秋江冷話)』에는 매년 3, 4, 5월 중 택일하여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사흘 동안 음주 가무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사에는 태조 왕건이 신검을 토벌할 때 당시 강릉 지역의 호족이었던 왕순식에게 태조가 말하기를 “꿈에 이상한 중이 갑옷을 입은 병사 3천을 거느리고 온 것을 보았는데 다음날 그대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도와주니 이상한 일이다”라고 하였고, 또한 왕순식이 “제가 명주에서 출발할 때 대현에서 승사가 있어 제사를 지냈는데 대왕이 보신 꿈이 이것입니다”라고 하여 대관령 성황사의 오랜 역사를 짐작케 한다. 강릉단오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강릉 출신 허균이 남겼다. 허균은 강릉단오제를 직접 보고 기록을 남겼는데 제사를 받는 대상이 김유신 장군이라고 썼다. 김유신은 어려서 명주에 유학하여 무술을 익히고 삼국을 통일한 후 죽어서 대관령 산신이 되었고 이 신이 영험하여 해마다 5월이면 대관령에 가서 신을 맞이하여 즐겁게 해 준다고 기록하였다. 그래서 신이 즐거우면 그해는 풍년이 들고 노하면 천재지변을 주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명주 사람들이 모두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며 신을 섬겼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강릉단오제의 구체적인 역사는 알 수 없으나 강릉단오제가 예부터 민중 중심의 행사였으며 관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진 민관공동의 축제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도 강릉단오제의 중요 제의(祭儀)는 강릉시장을 비롯한 각급 기관장들이 제관직을 수행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강릉단오제는 상하가 함께 했던 고대 제의가 지닌 축제적 모습을 온전히 지닌 행사라고 할 수 있다. 강릉단오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 • 단오제의 절차 단오제의 행사는 음력 4월 5일 신주근양(神酒謹釀, 신에게 드릴 술을 담그는 일)부터 음력 5월 7일 송신제(送神祭, 신을 대관령으로 보내는 제사)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에서 펼쳐지는데, 제사의 대상은 대관령 산신(김유신장군으로 전해짐)과 국사성황신(國師城隍神, 범일국사(梵日國師)라고 전해짐)이며 단오제를 지내지 않으면 이 지역에 큰 재앙이 미친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단오제는 음력 4월 15일 대관령산신당에서 제사를 올리고 신목(神木)을 모시고 내려와 구산성황당(邱山城隍堂)을 거쳐 홍제동에 있는 국사여성황당에 모셨다가 행사 전날인 음력 5월 3일 저녁 영신제(迎神祭)를 지내고 위패를 남대천 백사장에 마련된 제단에 옮겨 모심으로 강릉단오제의 서막이 시작된다. 단오장에서는 5일간 아침마다 제를 올리고 굿을 하며 풍농, 풍어 등을 기원하며 모두 한마음이 되어 제를 올린다. 그밖에 관노가면극, 그네, 씨름, 농악경연대회, 농요경창대회 등 수많은 민속놀이와 다양한 행사가 개최된다.
South Korea 2008 -
하회별신굿탈놀이 (河回別神굿탈놀이)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별신굿이란 3년, 5년 혹은 10년마다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한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는 약 500년 전부터 10년에 한번 섣달 보름날(12월 15일)이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무진생(戊辰生) 성황님에게 별신굿을 해왔으며 굿과 더불어 성황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놀이를 하였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각시의 무동마당·주지마당·백정마당·할미마당·파계승마당·양반과 선비마당·혼례마당·신방마당의 8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 대내림을 하는데, 정월 초이튿날 아침 성황당에 올라가 당방울이 달린 내림대를 잡고 성황신을 내리면 당방울을 성황대에 옮겨 달고 산에서 내려온다. 성황대와 내림대를 동사 처마에 기대어 세우면 비로소 놀이가 시작된다. 등장인물로는 주지승·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등이 있다. 파계승에 대한 비웃음과 양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해학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제사의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각시탈은 성황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 외에는 볼 수 없고, 부득이 꺼내볼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 놀이에 사용되는 탈은 주지탈 등을 포함하여 모두 10종 11개로 오리나무로 만들었으며 옻칠과 안료를 두세겹 칠하여 색조의 강도를 높였는데, 원본은 1964년 하회탈 및 병산탈로 지정되었다. 탈놀이의 반주는 꽹과리가 중심이 되는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진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탈을 태우며 즐기는 뒷풀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며, 우리나라 가면극의 발생과 기원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South Korea -
영산쇠머리대기 (靈山쇠머리대기)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영산쇠머리대기는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서 대보름축제를 배경으로 전승해온 대동놀이이다. 영산쇠머리대기는 나무로 엮어 만든 소를 어깨에 메고 맞부딪쳐서 상대방의 쇠머리를 쓰러뜨려 승패를 가르는 집단놀이이다. 영산쇠머리대기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영산의 영축산과 작약산(함박산)의 형상이 마치 두 마리의 황소가 겨루고 있는 것 같다 해서 산의 나쁜 기운을 풀어주고, 불행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영산쇠머리대기는 일종의 편싸움 놀이로, 마을을 동·서로 갈라 두 패로 편을 짜는데 이긴 편 마을에는 풍년이 들고 진 편 마을에는 흉년이 든다고 해서 농경의식의 하나로 전해져 왔다. 영산지방에서는 나무쇠싸움 목우전(木牛戰)이라는 이름으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민속놀이였으나 현재는 3·1문화제 행사의 하나로 줄다리기와 함께 행해지고 있다. 대보름이 다가오면 산신에게 고사를 지내고 나무를 길이 약 10m 정도로 베어온다. 통나무 3개를 세워 위를 하나로 묶고 아래 발은 넓게 펴 큰 통나무에 고정시켜 넘어지지 않도록 한다. 세운 나무 중간에 나무를 가로로 대고 튼튼하게 묶어 사람이 잡고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한다. 나무쇠 밑바닥에는 통나무를 가로, 세로 5∼6개씩 대고 엮어 땅에 놓아도 안정적이면서 싸울 때 메기 좋도록 한다. 앞에 세운 통나무 부분에 소머리 모형을 깎아 세우거나 가면을 만들어 세운다. 나무쇠를 메고 싸움터로 나가기 전에 동서 양편에서는 농악을 치고 깃발을 흔들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쇠머리 위에서는 대장, 중장, 소장 세 사람이 올라타고 지휘를 하는데, 사람들은 대장의 지휘에 따라 힘차고 민첩하게 행동해야만 승리할 수가 있다. 상대방의 쇠머리를 쓰러뜨리거나 자기 편의 쇠머리로 상대방의 쇠머리 위를 덮쳐 땅에 닿게 하면 이기게 된다. 영산쇠머리대기는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공동체의 민속놀이이며, 영산지방에서 생겨나 영산지방에서만 전승되어 오는 독특한 놀이이다.
South Korea -
발탈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발탈은 발에 탈을 쓰고 노는 놀이이다.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경기도 안성지방의 남사당패가 행하던 꼭두각시놀음이 변형되어 주로 중부지방에서 연희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발탈은 처음에는 허수아비 모양으로 만든 인형의 머리부분을 탈꾼의 발바닥에 씌우고 팔은 노끈으로 연결하여 당기거나 놓으면서 조종했다고 한다. 그 후 광무대 시절에 박춘재는 직접 손에 한삼을 끼고 공연하였으며, 남형우는 양팔 끝에 노끈을 연결시켜 위로 올린 것을 대나무에 연결하고 그 대나무를 양손으로 조종하면서 발탈놀이를 하였다. 초대 발탈 예능보유자인 이동안 씨는 두 가지 방법으로 다하여 왔으나 근래에는 손에 한삼을 끼고 하는 것은 손놀음이 불편할뿐 아니라 장시간 공연하기가 어려워 대나무로 양팔을 움직여서 공연하게 되었다. 탈판의 구조는 검은 포장으로 가로 약 2m, 세로 약 1m 정도의 포장막을 4각으로 짜서 탈꾼은 그 속에 누워 발만 포장 앞으로 내놓는다. 탈꾼은 발의 움직임과 손의 움직임을 기본으로 하여 노래와 춤 그리고 재담 등을 하고, 포장막 밖에 서는 어릿광대가 탈꾼을 상대해 주고, 양옆에서 피리, 젓대, 해금, 북, 장구 등 삼현육각이 반주를 해준다. 발탈놀이는 줄인형극과 장대인형극의 조정형식을 갖춘 인형극적 성격과 함께 가면극으로서의 성격도 가미되어 있다. 또한 이야기 속에는 잔재주나 장난기 뿐 아니라 사회를 보는 비판력과 관찰력이 예리하게 반영되어 있으며, 당시 짓눌렸던 서민들의 애환을 꾸밈없이 담고 있다는 데서 다른 지역의 탈놀이에 담긴 내재적 성격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South Korea -
진도다시래기 (珍島다시래기)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다시래기는 진도지방에서 초상이 났을 때, 특히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리며 행복하게 살다 죽은 사람의 초상일 경우 동네 상여꾼들이 상제를 위로하고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기 위해 전문예능인들을 불러 함께 밤을 지새우면서 노는 민속극적 성격이 짙은 상여놀이이다. 놀이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의 옛 무덤에서 보여지는 벽화와 고구려·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를 통해 오랜 옛날부터 장례에서 가무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진도다시래기는 다섯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마당은 가상제놀이로 가짜 상제가 나와 상여꾼들과 농담을 주고 받는다. 둘째마당은 봉사인 거사와 사당 그리고 중이 나와 노는데, 진도다시래기의 중심굿으로 민속가면극에서의 파계승 마당에 해당된다. 셋째마당은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만가를 부르는데 다른 지역의 상여소리와 달리 씻김굿의 무당노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넷째마당은 묘를 쓰며 부르는 가래소리를 하면서 흙을 파는 시늉을 한다. 다섯째마당은 여흥놀이로 이어져 예능인들은 후한 대접을 받는다. 진도다시래기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장례 때 무당단체인 신청(神廳)을 중심으로 조직된 당골 전문예능인들에 의해 전승된 민속극으로 장례풍속과 민속극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South Korea -
북청사자놀음 (北靑獅子놀음)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북청사자놀음은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정월 대보름에 사자탈을 쓰고 놀던 민속놀이로, 사자에게는 사악한 것을 물리칠 힘이 있다고 믿어 잡귀를 쫓고 마을의 평안를 비는 행사로 널리 행해졌다. 이 지방에서는 동네마다 사자를 꾸며서 놀았는데 각 동네에서 사자가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경연이 벌어졌다. 관원놀음과 함께 행해진 토성리의 사자놀음이 강세를 보이면서 다른 곳의 사자놀음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삼국시대 이래 민속놀이로 정착된 가면놀이로, 한국전쟁 이후 월남한 연희자들에 의해 현재는 서울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북청사자놀음은 음력 1월 14일 밤에 장정들의 횃불싸움으로 시작되어 15일 새벽까지 계속되었고, 16일부터는 초청받은 유지의 집을 돌며 놀았다. 먼저 마당돌이를 하고 사당춤, 무동춤, 꼽추춤 등으로 놀면 사자가 입장하여 한바탕 사자춤을 춘다. 사자가 안뜰을 거쳐 안방과 부엌에 들어가서 입을 벌려 무엇인가를 잡아 먹는 시늉을 하고, 다시 마당에 나와 활달하고 기교적인 춤을 추는데 이때 주인의 청에 따라 부엌의 조왕과 집안에 모셔 놓은 조령에게 절을 한다. 사자가 놀다가 기진하여 쓰러지면 대사를 불러 반야심경을 외우고, 효험이 없으면 의원을 불러 침을 놓아 일어나면 전원이 등장하여 함께 춤을 추며, 쌍사자를 놀리기도 한다. 놀음에는 사자, 양반, 꺾쇠, 꼽추, 사령, 무동, 사당, 중, 의원, 거사 등이 등장하는데 무동, 사당, 중, 의원, 거사는 탈을 쓰지 않고 복장만 갖추고 나온다. 악기로는 퉁소, 북, 징, 장구 등이 쓰이는데, 특히 경기지역의 탈춤은 삼현육각, 영남지방은 꽹과리가 위주인 것에 비해 퉁소가 많이 사용되는 것이 특징이다. 아이를 사자에게 태우면 수명이 길어진다 하여 사자에 태우기도 하고, 장수를 빌며 오색포편(五色布片)을 사자몸에 달아주기도 한다. 집집마다 돌며 거둔 돈이나 곡식은 마을의 장학금, 빈민구제, 경로회비용 및 사자춤비용 등에 사용한다. 북청사자놀음은 대사의 묘미나 풍자적인 측면보다는 사자춤의 묘기와 흥겨움이 중심이 되어 다른 사자춤사위보다 교묘하고 힘찬 동작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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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령탈춤 (康翎탈춤)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탈춤은 조선 전기까지 각 지방에서 행해지던 가면놀이이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궁중의 관장하에 “산대”라 불리는 무대에서 상연되던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형태로, 인종 12년(1634)에 궁중에서의 상연이 폐지되자 민중에게 유입되어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황해도탈춤은 황해도의 평산과 기린의 남북을 중심으로 북쪽의 봉산탈춤형과 남쪽의 해주탈춤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강령탈춤은 해주탈춤형으로 분류된다. 강령탈춤은 매년 단오에 행해지는데 사자춤·말뚝이춤·목중춤·상좌춤·양반과 말뚝이춤·노승과 취발이춤·영감과 할미광대춤의 7개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에 앞서 탈과 의상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공연장소까지 행렬하는 길놀이를 한다. 등장인물은 마부·사자·원숭이·말뚝이·목중·상좌·맏양반·둘째양반·재물대감·도령·영감·할미·용산삼개집·취발이·노승·소무 등 모두 20명이다. 파계승에 대한 풍자와 양반계급에 대한 모욕, 일부처첩의 삼각관계와 서민의 생활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춤은 느린 사위로 장삼소매를 고개 너머로 휘두르는 장삼춤이 주가 되며, 장단에는 도드리, 타령, 자진굿거리가 주로 쓰이지만 소리의 사설이 30여 가지나 되고 소리마다 장단이 특이하다. 강령탈춤의 내용 중에서 양반 3형제가 나와 양반의 근본을 찾고 말뚝이를 부르거나 말뚝이가 재담하는 과장은 경남의 오광대와 비슷하고, 할미광대가 물레를 돌리는 장면은 가산오광대와 매우 유사한데, 이러한 유사점은 탈춤의 전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사실적인 얼굴 모습을 묘사한 인물탈을 쓰고 장삼춤을 추는 아담하고 부드러운 점이 같은 황해도 탈춤인 봉산탈춤과 다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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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산대놀이 (松坡山臺놀이)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산대놀이란 중부지방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이다. 송파산대놀이는 서울·경기 지방에서 즐겼던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갈래로 춤과 무언극, 덕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의 놀이이다. 이 놀이는 매년 정월 대보름과 단오·백중·추석에 명절놀이로 공연되었다. 송파마을은 경기일원의 상업근거지였는데 약 200년전 송파장이 가장 번성하던 때에 산대놀이가 성행하여 오늘날까지 전하는 놀이형태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송파산대놀이는 전체 7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놀이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공연장소까지 행렬하는 길놀이를 하고, 가면을 배열해 놓고 고사를 지낸다. 놀이내용의 구성이나 과장·춤·탈 등이 양주별산대놀이와 거의 비슷하지만 몇 개의 탈과 춤, 배역이 옛 형태를 지닌 것이 특징이다. 즉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이미 사라진 화장무 춤사위가 남아 있고, 해산어멈·신할미·무당의 탈이 남아 있어 이들 탈들이 맡은 역이 따로 있다. 바가지, 소나무껍질, 종이 등으로 만든 탈 33개가 사용되며, 놀이형태는 다른 탈춤과 마찬가지로 춤이 주가 되고 재담과 동작이 곁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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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별산대놀이 (楊州別山臺놀이)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양주별산대놀이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 지역에서 전승되는 산대놀이 계통의 탈놀이다. 고려~조선 후기까지 전승되던 산대잡희(山臺雜戱)가 민간화되어 예인집단을 중심으로 서울에 본산대가 형성되었고, 양주에 전승된 것이다. 이 놀이는 중부지방의 탈춤을 대표하는 놀이로서 해서지역 탈춤과 함께 한국 가면극 중 연극적인 볼거리가 풍부한 가면극이다. 이 놀이는 제1과장 상좌 춤, 제2과장 옴중과 상좌, 제3과장 목중과 옴중, 제4과장 연잎과 눈끔적이, 제5과장 팔목중놀이, 제6과장 노장, 제7과장 샌님, 제8과장 신할아비와 미얄할미 등 전체 8개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에는 파계승,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 등이 등장하여 춤과 무언극, 덕담과 익살로 현실을 풍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월초파일, 단오, 추석 등에 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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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야류 (東萊野遊)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야류(들놀음)는 경상남도 내륙지방에서 행해지던 오광대가 바닷길을 따라 수영·동래·부산진 등에 전래된 것으로, 야류란 이름은 넓은 들판같은 곳에서 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오광대가 전문연예인에 의해 행해진 도시가면극이라면 야류는 비직업적인 연희자들, 즉 마을사람들에 의해 토착화된 놀이이다. 동래야류는 정월 대보름 저녁에 벌어졌는데, 그 해 농사를 점치거나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로 행해졌다고 한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약 100년전 인근 수영야류를 보고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며, 근래에는 대중오락적인 놀이로 공연되고 있다. 놀이는 문둥이춤·양반과 말뚝이의 재담·영노춤·할미와 영감춤의 4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놀이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공연장소까지 행렬하는 길놀이를 한다. 등장인물로는 원양반·둘째양반·모양반·영감·할미·제대각시·봉사·의원·무당·상도꾼 등이 있다. 줄거리는 양반에 대한 조롱과 모욕이 주를 이룬다. 탈은 대부분 바가지로 만드는데, 양반들 탈의 턱 부분을 움직이게 하여 재담을 할 때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턱이 움직이는 것이 특색이다. 반주악기는 대체로 타악기를 사용하며, 굿거리장단에 맞춰 추는 덧뵈기(탈놀이)춤이 주를 이루는데, 특히 말뚝이춤과 양반춤이 대표적이다. 동래야류는 같은 계통의 오광대 탈놀음과 달리 오방신장춤과 파계승에 대한 풍자, 사자춤 등이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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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율탈춤 (殷栗탈춤)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탈춤이란 한사람 또는 여러 사람이 가면으로 얼굴이나 머리 전체를 가리고 다른 인물, 동물 또는 초자연적 존재(신) 등으로 분장하여 음악에 맞추어 춤과 대사로써 연극하는 것을 말한다. 탈춤은 조선 전기까지 각 지방에서 행해지던 가면놀이이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궁중의 관장하에 “산대”라 불리는 무대에서 상연된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형태로, 조선 인종 12년(1634)에 궁중에서 상연이 폐지되자 민중에게 유입되어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은율탈춤은 단오에 2∼3일 동안 행해지고 그 밖에 석가탄신일과 7월 백중놀이로도 행해진다. 약 200∼300년 전에 난리를 피하기 위하여 섬으로 갔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얼굴을 내놓기가 부끄러워 탈을 쓴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놀이는 사자춤·상좌춤·8목중춤·노승춤·영감과 할미광대춤의 6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놀이에 앞서 숲에 모여 탈에 제사를 지내고 공연장소까지 탈과 의상을 갖추고 행렬하는 길놀이를 한다. 상좌·목중·말뚝이·맏양반·둘째양반·새맥시·셋째양반·원숭이·노승·최괄이·영감·할미·무당·사자·최괄이 아들 등 24명의 인물이 등장하며 파계승에 대한 풍자, 양반에 대한 모욕, 일부처첩(一夫妻妾)의 삼각관계와 서민생활상을 보여준다. 다른 탈춤에 비해 호색적인 표현이 심하며, 파계승보다 양반을 모욕하는 대목을 강조하고 있다. 팔목중춤 다음으로 양반춤이 나오는 것은 강령탈춤과 은율탈춤 뿐이다. 은율탈춤은 황해도 탈춤에서 나누어진 봉산탈춤과 해주탈춤의 상호교류와 영향관계를 잘 보여주는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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