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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
아리랑은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한민족이라면 거의 모두가 아리랑을 알고 즐겨 부른다. 아리랑은 단일한 하나의 곡이 아닌 한반도 전역에서 지역별로 다양한 곡조로 전승되었다. 전문가들은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전승되는 민요의 수가 약 60여 종, 3,600여 곡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리랑은 기본적으로 단순한 노래로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여음과 지역에 따라 다른 내용의 사설로 발전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아리랑의 가사(사설)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여음)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사설)” 아리랑의 사설은 특정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한국 일반 민중이 공동으로 창작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사랑, 연인과의 이별, 시집살이의 애환, 외세에 맞선 민족의 투쟁 등 민중이 삶의 현장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노랫말에 담았다. 아리랑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한국의 전통음악이라는 영역을 넘어 초현대적인 한국 문화의 모든 장르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아리랑은 발라드·로큰롤·힙합 등의 다양한 현대의 대중가요 장르는 물론이고 관현악곡 등으로도 편곡되어 폭넓은 청중에게 호소하며 한민족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런 이유로 아리랑은 한국의 비공식적 국가(國歌)로 묘사되기도 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연아 선수는 2011년 세계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아리랑 선율을 주제로 편곡한 ‘오마주 투 코리아(Homage to Korea)’라는 음악을 배경으로 피겨스케이트 프로그램을 연기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 상징의 하나이기도 한 아리랑은 영화·연극·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재로, 상품명이나 식당 이름, 방송국 회사 이름 등으로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South Korea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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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 한국의 전통 레슬링
씨름은 201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민속놀이 중 하나인 씨름은 벨트와 비슷한 모양의 긴 천으로 된 샅바를 허리와 한쪽 허벅지에 두른 2명의 선수가 상대의 샅바를 잡고 다양한 기술을 발휘하여 땅바닥으로 쓰러뜨리는 경기다. 명절이나 장날, 잔치 등의 다양한 행사에서 씨름 경기가 열린다. 마을에서 어떤 장소든 씨름 경기를 할 수 있으며,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공동체 구성원 전 연령이 참여할 수 있다. 성인 경기에서 최종 우승자는 풍년을 상징하는 황소를 부상으로 받고, ‘장사’라는 자격을 얻는다. 경기를 마친 후 장사는 황소를 타고 마을을 행진하며 축하를 받는다. 부상으로 소를 수여하는 풍습에는 농사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South Korea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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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녀(海女)문화
제주해녀문화는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제주도는 한반도 남해 바다의 화산섬으로 인구 약 60만 명이 살고 있다. 제주도의 일부 지형은 2007년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다. 제주 해녀들은 보통 잠수를 할 때마다 1분 정도 숨을 참고 수심 10m 아래 바다로 내려가 해산물을 채취한다. 잠수를 마치고 수면에 떠올라 숨을 내뱉을 때는 매우 특이한 소리를 내는데 이를 ‘숨비소리’라고 한다. 해녀는 여름철에는 하루 6~7시간, 겨울철에는 하루 4~5시간, 연간 90일 정도 작업한다. 제주 해녀들이 물질을 통해 얻은 소득은 가정 경제에 큰 도움이 된다. 제주 해녀들은 바다 속의 암초와 해산물의 서식처를 포함하여 바다에 관한 인지적 지도를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다. 또한 해당 지역의 조류와 바람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다. 이러한 머릿속 지도와 지식은 저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된 물질을 통해 경험으로 습득된다. 해녀들은 물질을 할 수 있는 날씨인지 아닌지를 공식적인 일기예보보다 물질 경력이 오래된 상군 해녀의 말을 듣고 판단한다. 제주 해녀들은 바다의 여신인 용왕할머니에게 제사(잠수굿)를 지내 바다에서 안전과 풍어를 기원한다. 잠수굿을 지낼 때는 해녀들이 ‘서우젯소리’를 부르기도 한다. 또한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물질을 할 바다로 나갈 때 불렀던 ‘해녀 노래’ 역시 제주 해녀 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South Korea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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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
강강술래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수천 년 동안 쌀농사를 지어온 한국과 동아시아 지역은 유럽의 밀농사의 문화와 다른 쌀농사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쌀농사 문화는 한국인의 생활의 모든 측면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으며, 강강술래는 이 같은 문화에서 발생한 세시풍속이다. 강강술래는 한반도의 놀이 음악과 놀이 춤의 기원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고 있다. 강강술래는 한반도의 남서 해안 지역에서 널리 행해졌고, ‘놋다리밟기’와 ‘월월이청청’ 등 내륙 지방의 다른 노래가 곁들어진 원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노래하고 춤추는 동안, 여성들은 둥그런 모양을 만들기 위해 손을 맞잡는다. 여러 가지 놀이를 곁들이고 있는 강강술래는 노래에서 거듭 반복되는 ‘강강술래’라는 후렴구에서 이름이 유래했지만 그 정확한 의미는 알려져 있지 않다. 강강술래는 원래 15세~20세까지의 젊은 여성들이 행했던 것이고 때로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여성들이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때는 창조적인 발랄함이나 힘보다는 능숙한 기예를 뽐내는 40대, 50대의 중년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전승하게 되었다. 강강술래는 전통적으로 설·대보름·단오·백중·추석·중구절(重九節) 등 한국의 대표적인 명절에 행해졌으며, 그 가운데 추석에 하는 것이 가장 규모가 컸다. 그래서 강강술래는 주로 추석에 널리 이루어지는 행사로 발전하게 되었다. 추석날 밤, 밝은 달밤에 수십 명의 젊은 농촌 여성들이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춘다. 해는 남성을 상징하며 달은 여성을 상징하고,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둥근 형태로 표현하므로, 강강술래는 고대의 미학을 반영하는 주술적 성격 가운데서도 모방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 이 춤은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젊은 여성들만이 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것은 가임 연령 여성들의 특권이기도 했다. 강강술래는 한국 고유의 원시종합예술이다. 노래의 가사는 보통 사람들이 지은 것이며, 앞소리(先唱)을 하는 사람이 빠르기를 정한다. 함께 춤추는 사람들은 앞소리를 하는 사람의 뒤를 따라 다음 가사를 노래하며 이것을 뒷소리(合唱)라고 한다. 강강술래에는 민속 신앙과 민속 춤 이외에 민속 음악이 결합되어 있으며, 한국의 전통적인 악기도 함께 곁들여져 흥을 돋운다. 강강술래가 너무 흥겹고 역동적이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달이 뜨는 초저녁부터 달이 질 때까지 자신도 모르게 춤추기를 계속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앞소리를 하는 사람의 소리 빠르기에 따라 음악은 긴강강술래(늦은강강술래), 중강강술래, 자진강강술래(잦은강강술래)로 나뉜다. 춤추는 사람들의 동작은 음악의 빠르기에 따라 달라진다. 춤이 진행되는 막간에는 농촌이나 어촌의 생활을 표현한 놀이가 진행된다. 이들 놀이 가운데는 남생이놀이(한 사람이 원 안으로 들어가 춤을 추면 그 다음 사람도 들어가 앞사람의 흉내를 낸다), 고사리 따기, 청어 엮기, 기와 밟기, 덕석몰이, 쥔쥐새끼놀이(꼬리를 집어 올리기), 문지기놀이, 가마등, 수건돌리기 등이 있다. 강강술래의 원형은 고대 중국의 문헌에 의하면 약 2,000년 전에 존재했던 마한의 농촌 풍습에서 발견된다. 인류 역사상 무형의 문화유산이 이처럼 오래 전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강강술래가 이처럼 오래 전해진 것은 사회와 가정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그처럼 오래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한국의 전통 사회는 남성 중심이었으며, 젊은 여성들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밤에 외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추석이 되면 여성들도 밝은 달밤에 강강술래를 통해 자유롭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오랫동안 쌓였던 울분을 토로할 수 있었다. 축제 때는 여성이 평소의 제약을 벗어나 그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강강술래는 또 역사적인 기능을 하기도 했다. 1592년 이순신 장군은 여자들에게 밤에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강강술래를 하도록 했다고 한다. 멀리서 보았을 때 깜박거리는 그림자 때문에 일본의 왜군은 이순신 장군의 병력을 과대평가했고, 결국 아군이 승리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가사를 귀 기울여 들어보면 거기에는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이 들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쓰인 가사에는 일제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농촌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도시로 떠났기 때문에 강강술래를 보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국가적으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국가의 문화·교육 정책에 힘입어 강강술래는 한반도의 남서쪽 지방이라는 전통적인 지역 기반을 벗어나 더 넓게 퍼져 나갔다. 오늘날 강강술래는 초등학교의 음악 교육 과정의 일부에 편입되어 있으며, 전국의 민간 축제에서뿐 아니라 많은 중·고·대학교에서도 널리 행해지고 있다. 근래에 이르러 예술 치료 요법 분야에서 강강술래의 응용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강강술래는 우울증 등의 정신적인 문제를 보이는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되고 있다. 그리고 비만 여성의 다이어트를 위한 대체 요법이나, 외로운 노인들의 웰빙을 강화하는 수단으로서의 가능성까지도 탐구되고 있다.
South Korea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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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장 (丹靑匠)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단청은 청색·적색·황색·백색·흑색 등 다섯 가지 색을 기본으로 하여 궁궐·사찰·사원 등에 여러 가지 무늬와 그림을 그려 장엄하게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단청은 단벽(丹碧)·단록(丹綠)·진채(眞彩)·당채(唐彩)·오채(五彩)·화채(畵彩)·단칠(丹漆) 등의 다른 이름이 있고, 이에 종사하는 사람을 단청장(丹靑匠)·화사(畵師)·화원(畵員)·화공(畵工)·가칠장(假漆匠)·도채장(塗彩匠) 등으로 부른다. 승려인 경우에는 화승(畵僧), 불화에 숙달된 승려는 금어(金魚), 단순한 단청장은 어장(魚杖)이라고도 일컫는다. 우리나라 단청은 삼국시대의 고분 등에서 기원을 살필 수 있고, 불교의 수용과 함께 더욱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단청을 하는 과정은 먼저 단청을 올릴 바탕을 닦는 일부터 시작한다. 아교를 넣고 묽게 끓인 물을 바탕에 바르고 거기에 가칠을 다섯 번 반복하여 초지를 마련한다. 초지 무늬를 건물에 올리기 위해서 전체 면에 청녹색 흙을 바르는 청토바르기를 한다. 그리고 도본(圖本)을 해당 면에 대고 분주머니를 두드리면 본의 무늬에 있는 송곳구멍으로 가루가 나와 바탕에 무늬가 박히게 된다. 이렇게 타분작업(打粉作業)이 끝나면 그 본에 따라 광물성 안료로 청·적·황·백·흑의 오색을 입히는데 각기 맡은 색만 찾아 그려 칸을 메워 단청을 끝내게 된다. 단청은 목재의 보존과 목재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표면도장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으며, 건물의 위엄과 신성함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건축에 많이 이용된다. 단청은 불교나 유교가 성행했던 한국·중국·일본에서 유행했으나, 오늘날까지 단청문화의 전통이 계승되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다.
South Korea -
사직대제 (社稷大祭)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사직대제는 땅과 곡식의 신에게 드리는 국가적인 제사로, 사(社)는 땅의 신, 직(稷)은 곡식의 신을 의미한다. 예로부터 나라를 세우면 먼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이와 함께 땅과 곡식의 신에게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풍요를 기원하는 사직제를 올렸다. 삼국시대부터 행해진 사직에 대한 제사는 자연에 감사하는 우리 조상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조선의 태조는 나라를 세우면서 궁궐과 함께 종묘, 사직단을 마련하여 경복궁의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고, 각 지방에도 사직단을 세워 백성의 편안함과 풍년을 기원하였다. 사직단은 동서로 사단((社壇:태사신과 후토신)과 직단(稷壇:태직신과 후직신)을 배치하였다. 태사(太社)와 태직(太稷) 신위는 단상 남쪽에 북향하고, 후토(后土) 신은 태사신위의 왼쪽에, 후직(后稷) 신위는 태직신의 왼쪽에 모두 동향하여 설치한다. 제사는 보통 2월과 8월에 지내고, 나라의 큰일이나 가뭄이 있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오늘날 행해지는 제사의식은 소·돼지·양의 생고기를 비롯한 각종 곡식을 마련하고, 영신·전폐·진찬·초헌례·아헌례·종헌례·음복례·철변두·송신·망료(망예)의 순서로 진행된다. 사직제에 사용되는 음악, 무용, 음식, 의복, 의기(儀器) 등을 비롯하여 제사를 행하는 우리 고유의 제사절차 등은 전통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사직대제는 고종 31년(1894)에 이르러 신관제(新官制)로 바뀌었고, 순종 2년(1908) 일본의 강압에 의해 폐해졌다. 이후 1988년 10월 종묘제례의 보유자였던 故이은표의 고증을 통해 복원하여 봉행되어 왔다.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내에 있는 사직대제봉행위원회에서 사직대제를 보존·계승하고 있다.
South Korea -
피리정악 및 대취타 (피리正樂 및 大吹打)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취타란 부는 악기(취악기)와 치는 악기(타악기)를 함께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대취타는 왕의 행차나 군대의 행진 또는 개선 등에 취타와 세악(비교적 음량이 적고 실내에 알맞은 악기들로 연주하는 국악 합주)을 대규모로 연주하는 것으로, ‘무령지곡’이라고도 한다. 취고수(취타 악사)들의 행진음악은 고구려 벽화라든가 백제의 악기에 관한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취각군이라는 군사가 있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으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 변화가 생겨 세악이 연주에 끼게 되었다. 군악수(취타와 세악을 연주하는 악사들을 합한 말)들은 황색 옷을 입고 남색 띠를 두르며 머리에는 초립을 쓰고, 악기는 징, 장구, 북, 나발, 소라, 태평소 등으로 편성된다. 집사(지휘봉이라 할 수 있는 등채를 양손에 받쳐들고 음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사람)의 호령에 따라 징이 울리고 북을 치면 모든 악기가 일제히 연주를 시작하는데, 매우 씩씩하고 우렁차며 장엄한 느낌을 준다. 한말 일본에 의해 군대가 해산된 후 형식을 갖추어 연주한 적은 없으며, 민간의 광고악대나 사찰의 의식에 사용되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지금은 거의 절멸상태에 있다. 대취타는 우리 선조들의 기개를 한층 더 느끼게 해주는 고귀한 음악으로 그 가치가 큰 소중한 문화재이다. ※ 명칭변경 : 대취타 → 피리정악및대취타 (변경일 : 1998.6.5.)
South Korea -
장 담그기 (醬 담그기)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장 담그기’는 콩을 사용하여 만든 식품인 장(醬) 그 자체의 효능을 넘어, 재료를 직접 준비해서 장을 만들고 발효시키는 전반적인 과정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두장(豆醬)문화권에 속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장을 만들어서 먹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장을 따로 보관하는 장고(醬庫)를 두었으며, ‘장고마마’라 불리는 상궁이 직접 장을 담그고 관리하는 등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장은 식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우리나라의 ‘장 담그기’는 콩 재배, 메주 만들기, 장 만들기, 장 가르기, 숙성과 발효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발전시켜왔다는 점에서 중국이나 일본과 구별되는 독특한 장 제조법을 가지고 있다. 또한, 메주를 띄우는 과정을 거친 후 된장과 간장 두 가지의 장을 만든다는 점, 전년도에 쓰고 남은 씨간장을 이용해 수년 동안 겹장의 형식을 거친다는 점 등은 한국의 장 담그기가 갖는 특징이자 독창적인 대목이다. ‘장 담그기’는 고대부터 오랫동안 장을 담가 먹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 우리나라 음식 조리법이나 식문화에 대한 연구 등 다양한 방향으로 연구될 수 있다는 점, 한국의 주거문화, 세시풍속, 기복신앙, 전통과학적 요소 등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 세대 간 전승에 의해 모든 한국인들이 직간접적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다만, ‘장 담그기’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각 가정을 중심으로 현재도 자연스럽게 전승되고 있는 생활관습이자 문화라는 점에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South Korea -
번와장 (翻瓦匠)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번와장'이란 지붕의 기와를 잇는 장인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기와를 사용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출토유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시기부터 번와와공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삼국시대의 기와기술은 더욱 발달하여 기록에 의하면 ‘와박사(瓦博士)’라는 장인이 있었고, 이들은 일본에 건너가 기와기술을 전해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원년(1392)에 ‘와서(瓦署)’를 설치하여 기와를 생산하도록 하였으며, 태종 6년(1406)에는 ‘별와요(別瓦窯)'에서 기와를 보급하도록 하였다. 별와요에는 와장을 비롯하여 승려도 배치하여 대대적으로 기와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와공의 명칭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기와를 만드는 제와(製瓦)기술자로 ‘와공(瓦工)’ 또는 ‘와장(瓦匠)’이라고 하며, 벽돌 만드는 장인이 기와도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와벽장(瓦壁匠)’이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 기와를 올리는 장인은 ‘개장(蓋匠)’이라고 하는데 이는 제와장인과 구분하기 위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기와를 만드는 것은 ‘번와(燔瓦)’라고 하고 기와 덮는 일을 ‘번와(翻瓦)'라고 하기 때문에 기와 덮는 장인을 ’번와와공(翻瓦瓦工)‘이라 한다. 지붕은 한국 건축을 형성하는 조형요소이면서 한국건축의 전통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부분중 하나이며, 한국 목조건축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술을 만들어 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기와지붕은 한국전통건축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인 곡선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으로 지붕의 조형적 특징은 번와 기술이 좌우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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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연죽장 (白銅煙竹匠)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연죽(煙竹)이란 일반적으로 담뱃대를 말한다. 백동으로 만든 담뱃대를 백동연죽이라 하며, 백동담뱃대를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백동연죽장이라고 한다. 담뱃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후 일본을 통해 담배가 전래되면서라고 전해지며, 그래서인지 대일무역의 중심지였던 동래가 전통적인 명산지이다. 담뱃대의 구조는 입에 물고 연기를 빨아들이는 물부리와 담배를 담아 태우는 대꼬바리 그리고 그것을 잇는 가는 대나무 설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대꼬바리는 열을 받는데다가 구조상 파손되기 쉬워서 구리, 놋쇠, 백동과 같은 금속으로 만든다. 간혹 사기제품도 볼 수 있으나 극히 드문 예이다. 물부리는 쇠붙이에 한하지 않고 옥(玉), 상아, 쇠뿔 등 비교적 여러 가지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편이다. 무늬에 따라 이름이 다른데, 무늬가 없는 백동연죽은 민죽, 무늬가 예쁜 것은 별죽·꽃대라 부른다. 별죽은 재료에 따라 은물죽, 오동죽이라 한다. 백동연죽을 만드는 과정은 제일 먼저 백동을 만드는데 동 58%, 니켈 37%, 아연 5%의 비율로 합금한다. 니켈의 함류량이 많으면 백색이 나타난다. 합금한 금속들을 두드려 매우 얇게 만들고, 무늬를 넣어 모든 부분을 땜질하여 만드는데 금·은세공과 같이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연죽은 동래의 파란장식 연죽과 금·은으로 새긴 담뱃대, 그리고 경주·김천·영해·울산·예천 등에서 만들어진 것이 유명하며, 전라북도 남원과 경기도 안성지방에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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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의 샛골나이 (羅州의 샛골나이)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나주의 샛골나이는 전남 나주 샛골의 무명짜는 직녀 또는 무명짜는 일에 대한 통칭이다. 목화를 원료로 만든 무명은 조선 초기부터 화폐의 구실을 하거나 일본과의 중요한 교역품 중에 하나였다. 무명의 제작과정은 재배와 수확, 씨앗기와 솜타기, 고치말기, 실잣기, 무명날기, 베매기, 무명짜기 순으로 이루어진다. 8월 중순 목화를 타고, 볕에 말린 후 씨아틀로 씨를 빼내는 씨앗기를 한다. 솜활을 이용하여 솜을 타고, 말대로 비벼 고치를 만든다. 물레를 이용하여 실을 뽑아 가락에 감는 실잣기 후 실의 굵기에 의해 한 폭에 몇 올이 들어갈지 결정하는 무명날기를 한다. 풀먹이기 과정인 베매기 후에는 베틀을 이용하여 직물을 짜면 무명이 완성된다. 나주의 나주세목 또는 샛골목은 오늘날의 12승 무명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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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장 (매듭匠)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매듭장이란 끈목多繒을 사용하여 여러 종류의 매듭을 짓고, 술을 만드는 기술 또는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끈목은 여러 가닥의 실을 합해서 3가닥 이상의 끈을 짜는 것을 말하는데, 그 종류에는 둘레가 둥근 끈으로 노리개나 주머니끈에 주로 쓰이는 동다회와 넓고 납짝한 끈으로 허리띠에 자주 사용되는 광다회가 있다. 복식이나 의식도구 장식으로 사용되는 매듭은 격답·결자라고 한다. 우리 전통공예의 한 분야인 매듭이 언제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지를 정확히 밝히기는 쉽지 않다. 다만, 우리나라의 매듭과 술 장식이 중국과의 빈번한 교류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짐작된다. 또 우리나라의 매듭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고 추정된다. 중국의 매듭은 종류가 다양하고 화려하다는 것이 특징이고, 일본은 매듭 자체의 장식성보다는 끈의 기능에 중점을 두었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의 전통매듭은 단색의 끈목을 이용하여 모양을 맺고 아래에 술을 달아 비례미와 율동미를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연봉매듭과 국화매듭, 잠자리매듭 등 동식물에서 따온 형태와 명칭이 많다. 매듭을 단순히 기능적인 면만이 아니라 주체를 돋보이는 장식적인 역할을 하되, 화려함보다는 단아한 기품으로 표현하였다고 하겠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소속의 매듭장이 있었다. 재료로는 명주실, 모시실, 닥나무실, 삼베실, 털실 등이 쓰인다. 끈의 색감, 굵기, 맺는 방법에 따라 형태가 다양하며 지방에 따라 그 이름도 다르다. 매듭의 이름은 생쪽, 나비, 잠자리, 국화 등 우리가 쉽게 보고 사용하는 온갖 물건, 꽃, 곤충에서 따왔다. 끈이나 매듭의 하단에 다는 것을 술이라 하는데 각종 악기, 교통용구, 불교 도구 등의 장식에 사용하였다. 술 또한 쓰임새에 따라 딸기술, 봉술, 호패술, 선추 등 다양하다. 같은 종류라도 궁중과 지방에 따라 그 품격이 달랐다.
South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