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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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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 탈춤
콘(Khon) 탈춤은 태국의 가면극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춤으로, 화려한 자수가 놓인 전통의상과 함께 장인들이 제작한 정교한 가면, 칼 등의 소품까지 태국 전통의 다양한 공예 예술 장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공연이다.\n\n전통적으로 콘 탈춤은 오직 왕궁 안에서만 공연하며 왕족인 남성들만 출 수 있었다. 전통적인 콘 공연에는 가면을 쓴 100여 명의 무용수들을 비롯해 극을 설명하는 서술자(Narrator)와 대규모 피파드(Piphat, 현악기와 타악기로 구성한 태국의 전통 음악 연주단), 코러스들이 참가한다.\n\n콘의 주제와 내용은 라마키엔(Ramikien)에 뿌리를 두고 있다. 라마키엔은 ‘마하바라타 (Mahbhrata, BC 3세기)’와 함께 인도의 2대 서사시로 꼽히는 라마야나(Ramayana, BC 2세기)를 17세기에 태국을 통일한 톤부리 왕조의 탁신 피야탁 왕대에 이르러 태국식 이야기로 변형한 서사시이다. 인도 라마야나에서는 ‘라마’를 힌두교의 신인 비슈누(Vishnu)의 화신으로 표현하지만 라마키엔에서는 힌두교적인 요소들을 벗겨내고 라마를 ‘붓다’의 전생으로 묘사한다.\n\n라마키엔은 시대를 관통하며 가면극과 인형극, 그림자 놀이, 고전적인 무용극 등 다양한 공연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또한 많은 화가들이 사원을 장식하는 그림의 주제로 삼기도 했는데, 왕궁인 ‘그랜드 팔래스’와 에메랄드 사원 ‘왓 프라캐우’ 본당에서도 그림으로 묘사된 ‘라마키엔’을 볼 수 있다.\n\n콘 탈춤이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최초로 ‘콘’을 언급한 기록은 1529년에 쓰인 태국 고대 문학 ‘Lilit Phra Lo'에서 확인할 수 있다. ‘콘’이라는 말은 드럼과 비슷한 전통 악기의 이름을 뜻하거나 혹은 콘 탈춤 공연에서 입는 의상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장식한다’는 뜻의 타밀어에서 유래되었다고도 알려진다. 이밖에 캄보디아 크메르(Kamer)어 사전에서는 역할극(role-play)을 뜻하는 말로 콘(Khon)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n\n콘 탈춤에서는 서술자의 낭송에 맞춰 춤꾼들이 무언으로 연기를 한다. 콘의 배역은 크게 영웅인 왕자, 공주, 거인 그리고 원숭이이다. 무대에서는 거인과 원숭이 역할만 가면을 쓰는데, 특히 원숭이 전사 하누만(Hanuman)과 파라 람(Phra Ram)은 콘에서 가장 중요한 배역이다.\n\n춤 동작은 실제와 같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강조한다. 원숭이 전사 역할은 원숭이의 몸짓을 똑같이 모사하되 아름답고 정제된 춤 동작으로 표현하는 것이 핵심이다. 재주넘기와 같은 어려운 동작을 유연하게 소화하기 위해 콘 무용수들은 매우 어린 나이부터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n\n현대의 콘 탈춤은 ‘라콘나이(Lakhon Nai, 왕실의 전통 인형 춤극)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전에는 남성이 맡았던 역할을 현대에는 여성들이 추며, 천사나 여신의 역할을 맡거나 원숭이와 악령으로 분하기도 한다. 여자 무용수들이 추는 변형된 콘 탈춤은 ‘Khon Phu Ying'으로 불리며, 'La Khon'은 콘 인형극을 뜻한다.\n\n출연자: 수파차이 인사왕(Insawang Suphachai)\n예술감독: 수파차이 인사왕(Insawang Suphachai)
Thailand -
콘 탈춤
콘(Khon) 탈춤은 태국의 가면극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춤으로, 화려한 자수가 놓인 전통의상과 함께 장인들이 제작한 정교한 가면, 칼 등의 소품까지 태국 전통의 다양한 공예 예술 장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공연이다.\n\n전통적으로 콘 탈춤은 오직 왕궁 안에서만 공연하며 왕족인 남성들만 출 수 있었다. 전통적인 콘 공연에는 가면을 쓴 100여 명의 무용수들을 비롯해 극을 설명하는 서술자(Narrator)와 대규모 피파드(Piphat, 현악기와 타악기로 구성한 태국의 전통 음악 연주단), 코러스들이 참가한다.\n\n콘의 주제와 내용은 라마키엔(Ramikien)에 뿌리를 두고 있다. 라마키엔은 ‘마하바라타 (Mahbhrata, BC 3세기)’와 함께 인도의 2대 서사시로 꼽히는 라마야나(Ramayana, BC 2세기)를 17세기에 태국을 통일한 톤부리 왕조의 탁신 피야탁 왕대에 이르러 태국식 이야기로 변형한 서사시이다. 인도 라마야나에서는 ‘라마’를 힌두교의 신인 비슈누(Vishnu)의 화신으로 표현하지만 라마키엔에서는 힌두교적인 요소들을 벗겨내고 라마를 ‘붓다’의 전생으로 묘사한다.\n\n라마키엔은 시대를 관통하며 가면극과 인형극, 그림자 놀이, 고전적인 무용극 등 다양한 공연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또한 많은 화가들이 사원을 장식하는 그림의 주제로 삼기도 했는데, 왕궁인 ‘그랜드 팔래스’와 에메랄드 사원 ‘왓 프라캐우’ 본당에서도 그림으로 묘사된 ‘라마키엔’을 볼 수 있다.\n\n콘 탈춤이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최초로 ‘콘’을 언급한 기록은 1529년에 쓰인 태국 고대 문학 ‘Lilit Phra Lo'에서 확인할 수 있다. ‘콘’이라는 말은 드럼과 비슷한 전통 악기의 이름을 뜻하거나 혹은 콘 탈춤 공연에서 입는 의상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장식한다’는 뜻의 타밀어에서 유래되었다고도 알려진다. 이밖에 캄보디아 크메르(Kamer)어 사전에서는 역할극(role-play)을 뜻하는 말로 콘(Khon)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n\n콘 탈춤에서는 서술자의 낭송에 맞춰 춤꾼들이 무언으로 연기를 한다. 콘의 배역은 크게 영웅인 왕자, 공주, 거인 그리고 원숭이이다. 무대에서는 거인과 원숭이 역할만 가면을 쓰는데, 특히 원숭이 전사 하누만(Hanuman)과 파라 람(Phra Ram)은 콘에서 가장 중요한 배역이다.\n\n춤 동작은 실제와 같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강조한다. 원숭이 전사 역할은 원숭이의 몸짓을 똑같이 모사하되 아름답고 정제된 춤 동작으로 표현하는 것이 핵심이다. 재주넘기와 같은 어려운 동작을 유연하게 소화하기 위해 콘 무용수들은 매우 어린 나이부터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n\n현대의 콘 탈춤은 ‘라콘나이(Lakhon Nai, 왕실의 전통 인형 춤극)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전에는 남성이 맡았던 역할을 현대에는 여성들이 추며, 천사나 여신의 역할을 맡거나 원숭이와 악령으로 분하기도 한다. 여자 무용수들이 추는 변형된 콘 탈춤은 ‘Khon Phu Ying'으로 불리며, 'La Khon'은 콘 인형극을 뜻한다.\n\n출연자: 수파차이 인사왕(Insawang Suphachai)\n예술감독: 수파차이 인사왕(Insawang Suphach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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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 탈춤
콘(Khon) 탈춤은 태국의 가면극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춤으로, 화려한 자수가 놓인 전통의상과 함께 장인들이 제작한 정교한 가면, 칼 등의 소품까지 태국 전통의 다양한 공예 예술 장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공연이다.\n\n전통적으로 콘 탈춤은 오직 왕궁 안에서만 공연하며 왕족인 남성들만 출 수 있었다. 전통적인 콘 공연에는 가면을 쓴 100여 명의 무용수들을 비롯해 극을 설명하는 서술자(Narrator)와 대규모 피파드(Piphat, 현악기와 타악기로 구성한 태국의 전통 음악 연주단), 코러스들이 참가한다.\n\n콘의 주제와 내용은 라마키엔(Ramikien)에 뿌리를 두고 있다. 라마키엔은 ‘마하바라타 (Mahbhrata, BC 3세기)’와 함께 인도의 2대 서사시로 꼽히는 라마야나(Ramayana, BC 2세기)를 17세기에 태국을 통일한 톤부리 왕조의 탁신 피야탁 왕대에 이르러 태국식 이야기로 변형한 서사시이다. 인도 라마야나에서는 ‘라마’를 힌두교의 신인 비슈누(Vishnu)의 화신으로 표현하지만 라마키엔에서는 힌두교적인 요소들을 벗겨내고 라마를 ‘붓다’의 전생으로 묘사한다.\n\n라마키엔은 시대를 관통하며 가면극과 인형극, 그림자 놀이, 고전적인 무용극 등 다양한 공연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또한 많은 화가들이 사원을 장식하는 그림의 주제로 삼기도 했는데, 왕궁인 ‘그랜드 팔래스’와 에메랄드 사원 ‘왓 프라캐우’ 본당에서도 그림으로 묘사된 ‘라마키엔’을 볼 수 있다.\n\n콘 탈춤이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최초로 ‘콘’을 언급한 기록은 1529년에 쓰인 태국 고대 문학 ‘Lilit Phra Lo'에서 확인할 수 있다. ‘콘’이라는 말은 드럼과 비슷한 전통 악기의 이름을 뜻하거나 혹은 콘 탈춤 공연에서 입는 의상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장식한다’는 뜻의 타밀어에서 유래되었다고도 알려진다. 이밖에 캄보디아 크메르(Kamer)어 사전에서는 역할극(role-play)을 뜻하는 말로 콘(Khon)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n\n콘 탈춤에서는 서술자의 낭송에 맞춰 춤꾼들이 무언으로 연기를 한다. 콘의 배역은 크게 영웅인 왕자, 공주, 거인 그리고 원숭이이다. 무대에서는 거인과 원숭이 역할만 가면을 쓰는데, 특히 원숭이 전사 하누만(Hanuman)과 파라 람(Phra Ram)은 콘에서 가장 중요한 배역이다.\n\n춤 동작은 실제와 같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강조한다. 원숭이 전사 역할은 원숭이의 몸짓을 똑같이 모사하되 아름답고 정제된 춤 동작으로 표현하는 것이 핵심이다. 재주넘기와 같은 어려운 동작을 유연하게 소화하기 위해 콘 무용수들은 매우 어린 나이부터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n\n현대의 콘 탈춤은 ‘라콘나이(Lakhon Nai, 왕실의 전통 인형 춤극)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전에는 남성이 맡았던 역할을 현대에는 여성들이 추며, 천사나 여신의 역할을 맡거나 원숭이와 악령으로 분하기도 한다. 여자 무용수들이 추는 변형된 콘 탈춤은 ‘Khon Phu Ying'으로 불리며, 'La Khon'은 콘 인형극을 뜻한다.\n\n출연자: 수파차이 인사왕(Insawang Suphachai)\n예술감독: 수파차이 인사왕(Insawang Suphach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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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 탈춤
콘(Khon) 탈춤은 태국의 가면극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춤으로, 화려한 자수가 놓인 전통의상과 함께 장인들이 제작한 정교한 가면, 칼 등의 소품까지 태국 전통의 다양한 공예 예술 장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공연이다.\n\n전통적으로 콘 탈춤은 오직 왕궁 안에서만 공연하며 왕족인 남성들만 출 수 있었다. 전통적인 콘 공연에는 가면을 쓴 100여 명의 무용수들을 비롯해 극을 설명하는 서술자(Narrator)와 대규모 피파드(Piphat, 현악기와 타악기로 구성한 태국의 전통 음악 연주단), 코러스들이 참가한다.\n\n콘의 주제와 내용은 라마키엔(Ramikien)에 뿌리를 두고 있다. 라마키엔은 ‘마하바라타 (Mahbhrata, BC 3세기)’와 함께 인도의 2대 서사시로 꼽히는 라마야나(Ramayana, BC 2세기)를 17세기에 태국을 통일한 톤부리 왕조의 탁신 피야탁 왕대에 이르러 태국식 이야기로 변형한 서사시이다. 인도 라마야나에서는 ‘라마’를 힌두교의 신인 비슈누(Vishnu)의 화신으로 표현하지만 라마키엔에서는 힌두교적인 요소들을 벗겨내고 라마를 ‘붓다’의 전생으로 묘사한다.\n\n라마키엔은 시대를 관통하며 가면극과 인형극, 그림자 놀이, 고전적인 무용극 등 다양한 공연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또한 많은 화가들이 사원을 장식하는 그림의 주제로 삼기도 했는데, 왕궁인 ‘그랜드 팔래스’와 에메랄드 사원 ‘왓 프라캐우’ 본당에서도 그림으로 묘사된 ‘라마키엔’을 볼 수 있다.\n\n콘 탈춤이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최초로 ‘콘’을 언급한 기록은 1529년에 쓰인 태국 고대 문학 ‘Lilit Phra Lo'에서 확인할 수 있다. ‘콘’이라는 말은 드럼과 비슷한 전통 악기의 이름을 뜻하거나 혹은 콘 탈춤 공연에서 입는 의상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장식한다’는 뜻의 타밀어에서 유래되었다고도 알려진다. 이밖에 캄보디아 크메르(Kamer)어 사전에서는 역할극(role-play)을 뜻하는 말로 콘(Khon)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n\n콘 탈춤에서는 서술자의 낭송에 맞춰 춤꾼들이 무언으로 연기를 한다. 콘의 배역은 크게 영웅인 왕자, 공주, 거인 그리고 원숭이이다. 무대에서는 거인과 원숭이 역할만 가면을 쓰는데, 특히 원숭이 전사 하누만(Hanuman)과 파라 람(Phra Ram)은 콘에서 가장 중요한 배역이다.\n\n춤 동작은 실제와 같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강조한다. 원숭이 전사 역할은 원숭이의 몸짓을 똑같이 모사하되 아름답고 정제된 춤 동작으로 표현하는 것이 핵심이다. 재주넘기와 같은 어려운 동작을 유연하게 소화하기 위해 콘 무용수들은 매우 어린 나이부터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n\n현대의 콘 탈춤은 ‘라콘나이(Lakhon Nai, 왕실의 전통 인형 춤극)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전에는 남성이 맡았던 역할을 현대에는 여성들이 추며, 천사나 여신의 역할을 맡거나 원숭이와 악령으로 분하기도 한다. 여자 무용수들이 추는 변형된 콘 탈춤은 ‘Khon Phu Ying'으로 불리며, 'La Khon'은 콘 인형극을 뜻한다.\n\n출연자: 수파차이 인사왕(Insawang Suphachai)\n예술감독: 수파차이 인사왕(Insawang Suphach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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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전지공예를 만나다
이것은 그저 한 청년의 이야기가 아닌, 전지공예에 관한 나와 내 친구들의 이야기다.\n\n어릴 적 전지공예에 대한 내 첫 기억은 창문 장식과 행운을 의미하는 푸(Fu) 글자를 종이로 만든 것이다. 나는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국가 무형유산 전승자이다.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예술과 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다섯 살 때, 나는 할머니를 따라 가위를 들고 빨간 종이에 그림을 오려내기 시작했고, 결국 종이 위에 사랑스러운 토끼 한 마리가 생생하게 나타났다. 비록 서툴고 어설펐지만, 할머니는 내가 전통예술을 좋아하는 것에 매우 흡족해하셨다. 수년간 연습하여 점차 수레국화, 하와이무궁화, 꽃다발 등 복잡한 패턴을 자를 수 있게 되었다. 매년 춘절이 되면, 우리 가족은 모여 앉아 경극을 부르고, 붓글씨를 쓰고, 친척과 친구들에게 선물할 전지공예를 만든다. 사람들이 내가 만든 작품을 칭찬해주고 좋아하는 걸 보면 전통 전지공예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커진다. \n\n자라면서 나는 무형유산으로서 전지공예가 소실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중국은 물론 전세계가 이 전통 문화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전승자들에게 많은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전통예술을 좋아하는 십대 청소년으로서 나는 해당 문화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함께 전지공예를 배우자고 했다. 내 할머니는 전지공예 확산과 전승을 위해 누구나 무료로 들을 수 있는 전지공예 강의를 열었다. 청년과 아이, 부모 등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까지, 전지공예를 좋아하는 이들이 강의에 참여했다. 우리는 전지공예를 만들고, 연습하고, 관련 대회와 전시에도 참여했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전지공예를 알게 되고 이 예술을 전수하게 되었다\n\n대학생이 된 지금 나는 전지공예를 배우고 보급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과 방법을 갖게 되었다. 2018년 여름사회활동 기간에 나는 열명이 넘는 친구들을 데리고 전지공예에 관한 체계적 설문조사를 수행하기 위해 내 고향, 산둥성 빈저우를 방문했다. 내 할머니를 포함하여 네 명의 전지공예 전승자들을 인터뷰하고, 이들로부터 전지공예 기술을 배우는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우리 학교인 상하이자오퉁대학 건물을 전지공예로 만들어 보았다. 또한 유치원을 방문해 지역 아이들이 전지공예를 배우는 걸 도왔다. 아이들의 눈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를 보고, 내가 처음 가위를 잡고 희열을 느꼈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나는 할머니를 도와 전지공예의 확산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꼈다. 또한 전지공예를 더욱 보호하고 진흥시키기 위해, 우리는 전지공예로 학생과 선생님들이 좋아할 만한 엽서를 만들었다. 학교를 본 딴 엽서는 선물용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고, 중국 문화 상품으로서 국내외 대학교간 교류에 사용되기 시작했다.\n\n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청년들은 현명한 조상들이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을 물려받음과 동시에 최신 문화의 영향과 유산 소실의 위험을 마주하고 있기에, 이러한 문화들의 전승과 혁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번은, 할머니가 길을 걷다가 떨어진 낙엽을 여러 개 주워서 이들의 모양을 유심히 살핀 후 전지공예 문양으로 그려 넣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세상 어느 것도 완벽하게 똑같은 것은 없다. 전지공예에선 나뭇잎 문양도 수천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고찰하고 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환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문화적 힘일 것이다. \n\n무형유산에 관심이 많은 나는 올해 여름방학에 학교에서 마련한 중국 남서부 무형유산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창작 제품을 만들어서 지역민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적이었다. 프로젝트를 위해 소수민족들이 모여 사는 구이저우성을 방문했다. 묘족 어린이들이 여전히 민족적 특징을 가진 자수와 은장식구를 배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수천 개의 묘족 부락 관광지를 관리하는 분을 인터뷰하며, 지역 비유산 문화의 전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교육으로, 무형유산을 학교에 도입하여 학생들이 해당 문화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업화로, 비유산 문화를 기반으로 시대에 맞게 변화된 문화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를 확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지공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지공예의 본질은 유지하면서 시대에 따른 혁신을 가하는 것이 최선의 전승 방법이다. 빈저우 전지공예 전승자 가운데 한 명인 겅(Geng)은 전지공예 요소를 적용한 청색 날염 옷감을 만들어서 판매했다. 상업화는 그에게 큰 수익을 안겨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지공예 문화를 촉진하는 데 일조했다.\n\n나는 아직 대학생이라 큰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예술과 커뮤니케이션, 기타 전문 지식을 습득하여 내 고향의 무형유산을 촉진하고 혁신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같은 뜻을 동료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나고 함께 노력하여 이 소중한 전통 문화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길 바란다.\n
China -
청년, 전지공예를 만나다
이것은 그저 한 청년의 이야기가 아닌, 전지공예에 관한 나와 내 친구들의 이야기다.\n\n어릴 적 전지공예에 대한 내 첫 기억은 창문 장식과 행운을 의미하는 푸(Fu) 글자를 종이로 만든 것이다. 나는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국가 무형유산 전승자이다.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예술과 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다섯 살 때, 나는 할머니를 따라 가위를 들고 빨간 종이에 그림을 오려내기 시작했고, 결국 종이 위에 사랑스러운 토끼 한 마리가 생생하게 나타났다. 비록 서툴고 어설펐지만, 할머니는 내가 전통예술을 좋아하는 것에 매우 흡족해하셨다. 수년간 연습하여 점차 수레국화, 하와이무궁화, 꽃다발 등 복잡한 패턴을 자를 수 있게 되었다. 매년 춘절이 되면, 우리 가족은 모여 앉아 경극을 부르고, 붓글씨를 쓰고, 친척과 친구들에게 선물할 전지공예를 만든다. 사람들이 내가 만든 작품을 칭찬해주고 좋아하는 걸 보면 전통 전지공예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커진다. \n\n자라면서 나는 무형유산으로서 전지공예가 소실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중국은 물론 전세계가 이 전통 문화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전승자들에게 많은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전통예술을 좋아하는 십대 청소년으로서 나는 해당 문화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함께 전지공예를 배우자고 했다. 내 할머니는 전지공예 확산과 전승을 위해 누구나 무료로 들을 수 있는 전지공예 강의를 열었다. 청년과 아이, 부모 등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까지, 전지공예를 좋아하는 이들이 강의에 참여했다. 우리는 전지공예를 만들고, 연습하고, 관련 대회와 전시에도 참여했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전지공예를 알게 되고 이 예술을 전수하게 되었다\n\n대학생이 된 지금 나는 전지공예를 배우고 보급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과 방법을 갖게 되었다. 2018년 여름사회활동 기간에 나는 열명이 넘는 친구들을 데리고 전지공예에 관한 체계적 설문조사를 수행하기 위해 내 고향, 산둥성 빈저우를 방문했다. 내 할머니를 포함하여 네 명의 전지공예 전승자들을 인터뷰하고, 이들로부터 전지공예 기술을 배우는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우리 학교인 상하이자오퉁대학 건물을 전지공예로 만들어 보았다. 또한 유치원을 방문해 지역 아이들이 전지공예를 배우는 걸 도왔다. 아이들의 눈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를 보고, 내가 처음 가위를 잡고 희열을 느꼈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나는 할머니를 도와 전지공예의 확산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꼈다. 또한 전지공예를 더욱 보호하고 진흥시키기 위해, 우리는 전지공예로 학생과 선생님들이 좋아할 만한 엽서를 만들었다. 학교를 본 딴 엽서는 선물용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고, 중국 문화 상품으로서 국내외 대학교간 교류에 사용되기 시작했다.\n\n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청년들은 현명한 조상들이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을 물려받음과 동시에 최신 문화의 영향과 유산 소실의 위험을 마주하고 있기에, 이러한 문화들의 전승과 혁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번은, 할머니가 길을 걷다가 떨어진 낙엽을 여러 개 주워서 이들의 모양을 유심히 살핀 후 전지공예 문양으로 그려 넣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세상 어느 것도 완벽하게 똑같은 것은 없다. 전지공예에선 나뭇잎 문양도 수천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고찰하고 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환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문화적 힘일 것이다. \n\n무형유산에 관심이 많은 나는 올해 여름방학에 학교에서 마련한 중국 남서부 무형유산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창작 제품을 만들어서 지역민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적이었다. 프로젝트를 위해 소수민족들이 모여 사는 구이저우성을 방문했다. 묘족 어린이들이 여전히 민족적 특징을 가진 자수와 은장식구를 배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수천 개의 묘족 부락 관광지를 관리하는 분을 인터뷰하며, 지역 비유산 문화의 전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교육으로, 무형유산을 학교에 도입하여 학생들이 해당 문화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업화로, 비유산 문화를 기반으로 시대에 맞게 변화된 문화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를 확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지공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지공예의 본질은 유지하면서 시대에 따른 혁신을 가하는 것이 최선의 전승 방법이다. 빈저우 전지공예 전승자 가운데 한 명인 겅(Geng)은 전지공예 요소를 적용한 청색 날염 옷감을 만들어서 판매했다. 상업화는 그에게 큰 수익을 안겨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지공예 문화를 촉진하는 데 일조했다.\n\n나는 아직 대학생이라 큰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예술과 커뮤니케이션, 기타 전문 지식을 습득하여 내 고향의 무형유산을 촉진하고 혁신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같은 뜻을 동료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나고 함께 노력하여 이 소중한 전통 문화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길 바란다.\n
China -
청년, 전지공예를 만나다
이것은 그저 한 청년의 이야기가 아닌, 전지공예에 관한 나와 내 친구들의 이야기다.\n\n어릴 적 전지공예에 대한 내 첫 기억은 창문 장식과 행운을 의미하는 푸(Fu) 글자를 종이로 만든 것이다. 나는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국가 무형유산 전승자이다.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예술과 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다섯 살 때, 나는 할머니를 따라 가위를 들고 빨간 종이에 그림을 오려내기 시작했고, 결국 종이 위에 사랑스러운 토끼 한 마리가 생생하게 나타났다. 비록 서툴고 어설펐지만, 할머니는 내가 전통예술을 좋아하는 것에 매우 흡족해하셨다. 수년간 연습하여 점차 수레국화, 하와이무궁화, 꽃다발 등 복잡한 패턴을 자를 수 있게 되었다. 매년 춘절이 되면, 우리 가족은 모여 앉아 경극을 부르고, 붓글씨를 쓰고, 친척과 친구들에게 선물할 전지공예를 만든다. 사람들이 내가 만든 작품을 칭찬해주고 좋아하는 걸 보면 전통 전지공예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커진다. \n\n자라면서 나는 무형유산으로서 전지공예가 소실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중국은 물론 전세계가 이 전통 문화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전승자들에게 많은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전통예술을 좋아하는 십대 청소년으로서 나는 해당 문화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함께 전지공예를 배우자고 했다. 내 할머니는 전지공예 확산과 전승을 위해 누구나 무료로 들을 수 있는 전지공예 강의를 열었다. 청년과 아이, 부모 등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까지, 전지공예를 좋아하는 이들이 강의에 참여했다. 우리는 전지공예를 만들고, 연습하고, 관련 대회와 전시에도 참여했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전지공예를 알게 되고 이 예술을 전수하게 되었다\n\n대학생이 된 지금 나는 전지공예를 배우고 보급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과 방법을 갖게 되었다. 2018년 여름사회활동 기간에 나는 열명이 넘는 친구들을 데리고 전지공예에 관한 체계적 설문조사를 수행하기 위해 내 고향, 산둥성 빈저우를 방문했다. 내 할머니를 포함하여 네 명의 전지공예 전승자들을 인터뷰하고, 이들로부터 전지공예 기술을 배우는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우리 학교인 상하이자오퉁대학 건물을 전지공예로 만들어 보았다. 또한 유치원을 방문해 지역 아이들이 전지공예를 배우는 걸 도왔다. 아이들의 눈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를 보고, 내가 처음 가위를 잡고 희열을 느꼈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나는 할머니를 도와 전지공예의 확산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꼈다. 또한 전지공예를 더욱 보호하고 진흥시키기 위해, 우리는 전지공예로 학생과 선생님들이 좋아할 만한 엽서를 만들었다. 학교를 본 딴 엽서는 선물용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고, 중국 문화 상품으로서 국내외 대학교간 교류에 사용되기 시작했다.\n\n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청년들은 현명한 조상들이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을 물려받음과 동시에 최신 문화의 영향과 유산 소실의 위험을 마주하고 있기에, 이러한 문화들의 전승과 혁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번은, 할머니가 길을 걷다가 떨어진 낙엽을 여러 개 주워서 이들의 모양을 유심히 살핀 후 전지공예 문양으로 그려 넣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세상 어느 것도 완벽하게 똑같은 것은 없다. 전지공예에선 나뭇잎 문양도 수천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고찰하고 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환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문화적 힘일 것이다. \n\n무형유산에 관심이 많은 나는 올해 여름방학에 학교에서 마련한 중국 남서부 무형유산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창작 제품을 만들어서 지역민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적이었다. 프로젝트를 위해 소수민족들이 모여 사는 구이저우성을 방문했다. 묘족 어린이들이 여전히 민족적 특징을 가진 자수와 은장식구를 배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수천 개의 묘족 부락 관광지를 관리하는 분을 인터뷰하며, 지역 비유산 문화의 전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교육으로, 무형유산을 학교에 도입하여 학생들이 해당 문화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업화로, 비유산 문화를 기반으로 시대에 맞게 변화된 문화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를 확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지공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지공예의 본질은 유지하면서 시대에 따른 혁신을 가하는 것이 최선의 전승 방법이다. 빈저우 전지공예 전승자 가운데 한 명인 겅(Geng)은 전지공예 요소를 적용한 청색 날염 옷감을 만들어서 판매했다. 상업화는 그에게 큰 수익을 안겨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지공예 문화를 촉진하는 데 일조했다.\n\n나는 아직 대학생이라 큰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예술과 커뮤니케이션, 기타 전문 지식을 습득하여 내 고향의 무형유산을 촉진하고 혁신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같은 뜻을 동료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나고 함께 노력하여 이 소중한 전통 문화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길 바란다.\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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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전지공예를 만나다
이것은 그저 한 청년의 이야기가 아닌, 전지공예에 관한 나와 내 친구들의 이야기다.\n\n어릴 적 전지공예에 대한 내 첫 기억은 창문 장식과 행운을 의미하는 푸(Fu) 글자를 종이로 만든 것이다. 나는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국가 무형유산 전승자이다.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예술과 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다섯 살 때, 나는 할머니를 따라 가위를 들고 빨간 종이에 그림을 오려내기 시작했고, 결국 종이 위에 사랑스러운 토끼 한 마리가 생생하게 나타났다. 비록 서툴고 어설펐지만, 할머니는 내가 전통예술을 좋아하는 것에 매우 흡족해하셨다. 수년간 연습하여 점차 수레국화, 하와이무궁화, 꽃다발 등 복잡한 패턴을 자를 수 있게 되었다. 매년 춘절이 되면, 우리 가족은 모여 앉아 경극을 부르고, 붓글씨를 쓰고, 친척과 친구들에게 선물할 전지공예를 만든다. 사람들이 내가 만든 작품을 칭찬해주고 좋아하는 걸 보면 전통 전지공예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커진다. \n\n자라면서 나는 무형유산으로서 전지공예가 소실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중국은 물론 전세계가 이 전통 문화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전승자들에게 많은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전통예술을 좋아하는 십대 청소년으로서 나는 해당 문화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함께 전지공예를 배우자고 했다. 내 할머니는 전지공예 확산과 전승을 위해 누구나 무료로 들을 수 있는 전지공예 강의를 열었다. 청년과 아이, 부모 등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까지, 전지공예를 좋아하는 이들이 강의에 참여했다. 우리는 전지공예를 만들고, 연습하고, 관련 대회와 전시에도 참여했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전지공예를 알게 되고 이 예술을 전수하게 되었다\n\n대학생이 된 지금 나는 전지공예를 배우고 보급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과 방법을 갖게 되었다. 2018년 여름사회활동 기간에 나는 열명이 넘는 친구들을 데리고 전지공예에 관한 체계적 설문조사를 수행하기 위해 내 고향, 산둥성 빈저우를 방문했다. 내 할머니를 포함하여 네 명의 전지공예 전승자들을 인터뷰하고, 이들로부터 전지공예 기술을 배우는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우리 학교인 상하이자오퉁대학 건물을 전지공예로 만들어 보았다. 또한 유치원을 방문해 지역 아이들이 전지공예를 배우는 걸 도왔다. 아이들의 눈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를 보고, 내가 처음 가위를 잡고 희열을 느꼈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나는 할머니를 도와 전지공예의 확산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꼈다. 또한 전지공예를 더욱 보호하고 진흥시키기 위해, 우리는 전지공예로 학생과 선생님들이 좋아할 만한 엽서를 만들었다. 학교를 본 딴 엽서는 선물용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고, 중국 문화 상품으로서 국내외 대학교간 교류에 사용되기 시작했다.\n\n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청년들은 현명한 조상들이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을 물려받음과 동시에 최신 문화의 영향과 유산 소실의 위험을 마주하고 있기에, 이러한 문화들의 전승과 혁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번은, 할머니가 길을 걷다가 떨어진 낙엽을 여러 개 주워서 이들의 모양을 유심히 살핀 후 전지공예 문양으로 그려 넣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세상 어느 것도 완벽하게 똑같은 것은 없다. 전지공예에선 나뭇잎 문양도 수천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고찰하고 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환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문화적 힘일 것이다. \n\n무형유산에 관심이 많은 나는 올해 여름방학에 학교에서 마련한 중국 남서부 무형유산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창작 제품을 만들어서 지역민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적이었다. 프로젝트를 위해 소수민족들이 모여 사는 구이저우성을 방문했다. 묘족 어린이들이 여전히 민족적 특징을 가진 자수와 은장식구를 배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수천 개의 묘족 부락 관광지를 관리하는 분을 인터뷰하며, 지역 비유산 문화의 전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교육으로, 무형유산을 학교에 도입하여 학생들이 해당 문화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업화로, 비유산 문화를 기반으로 시대에 맞게 변화된 문화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를 확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지공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지공예의 본질은 유지하면서 시대에 따른 혁신을 가하는 것이 최선의 전승 방법이다. 빈저우 전지공예 전승자 가운데 한 명인 겅(Geng)은 전지공예 요소를 적용한 청색 날염 옷감을 만들어서 판매했다. 상업화는 그에게 큰 수익을 안겨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지공예 문화를 촉진하는 데 일조했다.\n\n나는 아직 대학생이라 큰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예술과 커뮤니케이션, 기타 전문 지식을 습득하여 내 고향의 무형유산을 촉진하고 혁신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같은 뜻을 동료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나고 함께 노력하여 이 소중한 전통 문화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길 바란다.\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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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전지공예를 만나다
이것은 그저 한 청년의 이야기가 아닌, 전지공예에 관한 나와 내 친구들의 이야기다.\n\n어릴 적 전지공예에 대한 내 첫 기억은 창문 장식과 행운을 의미하는 푸(Fu) 글자를 종이로 만든 것이다. 나는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국가 무형유산 전승자이다.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예술과 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다섯 살 때, 나는 할머니를 따라 가위를 들고 빨간 종이에 그림을 오려내기 시작했고, 결국 종이 위에 사랑스러운 토끼 한 마리가 생생하게 나타났다. 비록 서툴고 어설펐지만, 할머니는 내가 전통예술을 좋아하는 것에 매우 흡족해하셨다. 수년간 연습하여 점차 수레국화, 하와이무궁화, 꽃다발 등 복잡한 패턴을 자를 수 있게 되었다. 매년 춘절이 되면, 우리 가족은 모여 앉아 경극을 부르고, 붓글씨를 쓰고, 친척과 친구들에게 선물할 전지공예를 만든다. 사람들이 내가 만든 작품을 칭찬해주고 좋아하는 걸 보면 전통 전지공예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커진다. \n\n자라면서 나는 무형유산으로서 전지공예가 소실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중국은 물론 전세계가 이 전통 문화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전승자들에게 많은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전통예술을 좋아하는 십대 청소년으로서 나는 해당 문화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함께 전지공예를 배우자고 했다. 내 할머니는 전지공예 확산과 전승을 위해 누구나 무료로 들을 수 있는 전지공예 강의를 열었다. 청년과 아이, 부모 등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까지, 전지공예를 좋아하는 이들이 강의에 참여했다. 우리는 전지공예를 만들고, 연습하고, 관련 대회와 전시에도 참여했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전지공예를 알게 되고 이 예술을 전수하게 되었다\n\n대학생이 된 지금 나는 전지공예를 배우고 보급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과 방법을 갖게 되었다. 2018년 여름사회활동 기간에 나는 열명이 넘는 친구들을 데리고 전지공예에 관한 체계적 설문조사를 수행하기 위해 내 고향, 산둥성 빈저우를 방문했다. 내 할머니를 포함하여 네 명의 전지공예 전승자들을 인터뷰하고, 이들로부터 전지공예 기술을 배우는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우리 학교인 상하이자오퉁대학 건물을 전지공예로 만들어 보았다. 또한 유치원을 방문해 지역 아이들이 전지공예를 배우는 걸 도왔다. 아이들의 눈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를 보고, 내가 처음 가위를 잡고 희열을 느꼈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나는 할머니를 도와 전지공예의 확산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꼈다. 또한 전지공예를 더욱 보호하고 진흥시키기 위해, 우리는 전지공예로 학생과 선생님들이 좋아할 만한 엽서를 만들었다. 학교를 본 딴 엽서는 선물용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고, 중국 문화 상품으로서 국내외 대학교간 교류에 사용되기 시작했다.\n\n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청년들은 현명한 조상들이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을 물려받음과 동시에 최신 문화의 영향과 유산 소실의 위험을 마주하고 있기에, 이러한 문화들의 전승과 혁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번은, 할머니가 길을 걷다가 떨어진 낙엽을 여러 개 주워서 이들의 모양을 유심히 살핀 후 전지공예 문양으로 그려 넣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세상 어느 것도 완벽하게 똑같은 것은 없다. 전지공예에선 나뭇잎 문양도 수천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고찰하고 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환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문화적 힘일 것이다. \n\n무형유산에 관심이 많은 나는 올해 여름방학에 학교에서 마련한 중국 남서부 무형유산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창작 제품을 만들어서 지역민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적이었다. 프로젝트를 위해 소수민족들이 모여 사는 구이저우성을 방문했다. 묘족 어린이들이 여전히 민족적 특징을 가진 자수와 은장식구를 배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수천 개의 묘족 부락 관광지를 관리하는 분을 인터뷰하며, 지역 비유산 문화의 전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교육으로, 무형유산을 학교에 도입하여 학생들이 해당 문화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업화로, 비유산 문화를 기반으로 시대에 맞게 변화된 문화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를 확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지공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지공예의 본질은 유지하면서 시대에 따른 혁신을 가하는 것이 최선의 전승 방법이다. 빈저우 전지공예 전승자 가운데 한 명인 겅(Geng)은 전지공예 요소를 적용한 청색 날염 옷감을 만들어서 판매했다. 상업화는 그에게 큰 수익을 안겨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지공예 문화를 촉진하는 데 일조했다.\n\n나는 아직 대학생이라 큰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예술과 커뮤니케이션, 기타 전문 지식을 습득하여 내 고향의 무형유산을 촉진하고 혁신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같은 뜻을 동료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나고 함께 노력하여 이 소중한 전통 문화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길 바란다.\n
China -
청년, 전지공예를 만나다
이것은 그저 한 청년의 이야기가 아닌, 전지공예에 관한 나와 내 친구들의 이야기다.\n\n어릴 적 전지공예에 대한 내 첫 기억은 창문 장식과 행운을 의미하는 푸(Fu) 글자를 종이로 만든 것이다. 나는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국가 무형유산 전승자이다.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예술과 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다섯 살 때, 나는 할머니를 따라 가위를 들고 빨간 종이에 그림을 오려내기 시작했고, 결국 종이 위에 사랑스러운 토끼 한 마리가 생생하게 나타났다. 비록 서툴고 어설펐지만, 할머니는 내가 전통예술을 좋아하는 것에 매우 흡족해하셨다. 수년간 연습하여 점차 수레국화, 하와이무궁화, 꽃다발 등 복잡한 패턴을 자를 수 있게 되었다. 매년 춘절이 되면, 우리 가족은 모여 앉아 경극을 부르고, 붓글씨를 쓰고, 친척과 친구들에게 선물할 전지공예를 만든다. 사람들이 내가 만든 작품을 칭찬해주고 좋아하는 걸 보면 전통 전지공예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커진다. \n\n자라면서 나는 무형유산으로서 전지공예가 소실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중국은 물론 전세계가 이 전통 문화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전승자들에게 많은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전통예술을 좋아하는 십대 청소년으로서 나는 해당 문화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함께 전지공예를 배우자고 했다. 내 할머니는 전지공예 확산과 전승을 위해 누구나 무료로 들을 수 있는 전지공예 강의를 열었다. 청년과 아이, 부모 등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까지, 전지공예를 좋아하는 이들이 강의에 참여했다. 우리는 전지공예를 만들고, 연습하고, 관련 대회와 전시에도 참여했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전지공예를 알게 되고 이 예술을 전수하게 되었다\n\n대학생이 된 지금 나는 전지공예를 배우고 보급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과 방법을 갖게 되었다. 2018년 여름사회활동 기간에 나는 열명이 넘는 친구들을 데리고 전지공예에 관한 체계적 설문조사를 수행하기 위해 내 고향, 산둥성 빈저우를 방문했다. 내 할머니를 포함하여 네 명의 전지공예 전승자들을 인터뷰하고, 이들로부터 전지공예 기술을 배우는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우리 학교인 상하이자오퉁대학 건물을 전지공예로 만들어 보았다. 또한 유치원을 방문해 지역 아이들이 전지공예를 배우는 걸 도왔다. 아이들의 눈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를 보고, 내가 처음 가위를 잡고 희열을 느꼈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나는 할머니를 도와 전지공예의 확산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꼈다. 또한 전지공예를 더욱 보호하고 진흥시키기 위해, 우리는 전지공예로 학생과 선생님들이 좋아할 만한 엽서를 만들었다. 학교를 본 딴 엽서는 선물용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고, 중국 문화 상품으로서 국내외 대학교간 교류에 사용되기 시작했다.\n\n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청년들은 현명한 조상들이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을 물려받음과 동시에 최신 문화의 영향과 유산 소실의 위험을 마주하고 있기에, 이러한 문화들의 전승과 혁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번은, 할머니가 길을 걷다가 떨어진 낙엽을 여러 개 주워서 이들의 모양을 유심히 살핀 후 전지공예 문양으로 그려 넣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세상 어느 것도 완벽하게 똑같은 것은 없다. 전지공예에선 나뭇잎 문양도 수천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고찰하고 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환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문화적 힘일 것이다. \n\n무형유산에 관심이 많은 나는 올해 여름방학에 학교에서 마련한 중국 남서부 무형유산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창작 제품을 만들어서 지역민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적이었다. 프로젝트를 위해 소수민족들이 모여 사는 구이저우성을 방문했다. 묘족 어린이들이 여전히 민족적 특징을 가진 자수와 은장식구를 배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수천 개의 묘족 부락 관광지를 관리하는 분을 인터뷰하며, 지역 비유산 문화의 전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교육으로, 무형유산을 학교에 도입하여 학생들이 해당 문화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업화로, 비유산 문화를 기반으로 시대에 맞게 변화된 문화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를 확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지공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지공예의 본질은 유지하면서 시대에 따른 혁신을 가하는 것이 최선의 전승 방법이다. 빈저우 전지공예 전승자 가운데 한 명인 겅(Geng)은 전지공예 요소를 적용한 청색 날염 옷감을 만들어서 판매했다. 상업화는 그에게 큰 수익을 안겨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지공예 문화를 촉진하는 데 일조했다.\n\n나는 아직 대학생이라 큰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예술과 커뮤니케이션, 기타 전문 지식을 습득하여 내 고향의 무형유산을 촉진하고 혁신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같은 뜻을 동료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나고 함께 노력하여 이 소중한 전통 문화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길 바란다.\n
China -
청년, 전지공예를 만나다
이것은 그저 한 청년의 이야기가 아닌, 전지공예에 관한 나와 내 친구들의 이야기다.\n\n어릴 적 전지공예에 대한 내 첫 기억은 창문 장식과 행운을 의미하는 푸(Fu) 글자를 종이로 만든 것이다. 나는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국가 무형유산 전승자이다.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예술과 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다섯 살 때, 나는 할머니를 따라 가위를 들고 빨간 종이에 그림을 오려내기 시작했고, 결국 종이 위에 사랑스러운 토끼 한 마리가 생생하게 나타났다. 비록 서툴고 어설펐지만, 할머니는 내가 전통예술을 좋아하는 것에 매우 흡족해하셨다. 수년간 연습하여 점차 수레국화, 하와이무궁화, 꽃다발 등 복잡한 패턴을 자를 수 있게 되었다. 매년 춘절이 되면, 우리 가족은 모여 앉아 경극을 부르고, 붓글씨를 쓰고, 친척과 친구들에게 선물할 전지공예를 만든다. 사람들이 내가 만든 작품을 칭찬해주고 좋아하는 걸 보면 전통 전지공예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커진다. \n\n자라면서 나는 무형유산으로서 전지공예가 소실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중국은 물론 전세계가 이 전통 문화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전승자들에게 많은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전통예술을 좋아하는 십대 청소년으로서 나는 해당 문화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함께 전지공예를 배우자고 했다. 내 할머니는 전지공예 확산과 전승을 위해 누구나 무료로 들을 수 있는 전지공예 강의를 열었다. 청년과 아이, 부모 등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까지, 전지공예를 좋아하는 이들이 강의에 참여했다. 우리는 전지공예를 만들고, 연습하고, 관련 대회와 전시에도 참여했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전지공예를 알게 되고 이 예술을 전수하게 되었다\n\n대학생이 된 지금 나는 전지공예를 배우고 보급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과 방법을 갖게 되었다. 2018년 여름사회활동 기간에 나는 열명이 넘는 친구들을 데리고 전지공예에 관한 체계적 설문조사를 수행하기 위해 내 고향, 산둥성 빈저우를 방문했다. 내 할머니를 포함하여 네 명의 전지공예 전승자들을 인터뷰하고, 이들로부터 전지공예 기술을 배우는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우리 학교인 상하이자오퉁대학 건물을 전지공예로 만들어 보았다. 또한 유치원을 방문해 지역 아이들이 전지공예를 배우는 걸 도왔다. 아이들의 눈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를 보고, 내가 처음 가위를 잡고 희열을 느꼈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나는 할머니를 도와 전지공예의 확산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꼈다. 또한 전지공예를 더욱 보호하고 진흥시키기 위해, 우리는 전지공예로 학생과 선생님들이 좋아할 만한 엽서를 만들었다. 학교를 본 딴 엽서는 선물용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고, 중국 문화 상품으로서 국내외 대학교간 교류에 사용되기 시작했다.\n\n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청년들은 현명한 조상들이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을 물려받음과 동시에 최신 문화의 영향과 유산 소실의 위험을 마주하고 있기에, 이러한 문화들의 전승과 혁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번은, 할머니가 길을 걷다가 떨어진 낙엽을 여러 개 주워서 이들의 모양을 유심히 살핀 후 전지공예 문양으로 그려 넣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세상 어느 것도 완벽하게 똑같은 것은 없다. 전지공예에선 나뭇잎 문양도 수천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고찰하고 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환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문화적 힘일 것이다. \n\n무형유산에 관심이 많은 나는 올해 여름방학에 학교에서 마련한 중국 남서부 무형유산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창작 제품을 만들어서 지역민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적이었다. 프로젝트를 위해 소수민족들이 모여 사는 구이저우성을 방문했다. 묘족 어린이들이 여전히 민족적 특징을 가진 자수와 은장식구를 배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수천 개의 묘족 부락 관광지를 관리하는 분을 인터뷰하며, 지역 비유산 문화의 전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교육으로, 무형유산을 학교에 도입하여 학생들이 해당 문화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업화로, 비유산 문화를 기반으로 시대에 맞게 변화된 문화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를 확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지공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지공예의 본질은 유지하면서 시대에 따른 혁신을 가하는 것이 최선의 전승 방법이다. 빈저우 전지공예 전승자 가운데 한 명인 겅(Geng)은 전지공예 요소를 적용한 청색 날염 옷감을 만들어서 판매했다. 상업화는 그에게 큰 수익을 안겨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지공예 문화를 촉진하는 데 일조했다.\n\n나는 아직 대학생이라 큰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예술과 커뮤니케이션, 기타 전문 지식을 습득하여 내 고향의 무형유산을 촉진하고 혁신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같은 뜻을 동료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나고 함께 노력하여 이 소중한 전통 문화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길 바란다.\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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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전지공예를 만나다
이것은 그저 한 청년의 이야기가 아닌, 전지공예에 관한 나와 내 친구들의 이야기다.\n\n어릴 적 전지공예에 대한 내 첫 기억은 창문 장식과 행운을 의미하는 푸(Fu) 글자를 종이로 만든 것이다. 나는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국가 무형유산 전승자이다.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예술과 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다섯 살 때, 나는 할머니를 따라 가위를 들고 빨간 종이에 그림을 오려내기 시작했고, 결국 종이 위에 사랑스러운 토끼 한 마리가 생생하게 나타났다. 비록 서툴고 어설펐지만, 할머니는 내가 전통예술을 좋아하는 것에 매우 흡족해하셨다. 수년간 연습하여 점차 수레국화, 하와이무궁화, 꽃다발 등 복잡한 패턴을 자를 수 있게 되었다. 매년 춘절이 되면, 우리 가족은 모여 앉아 경극을 부르고, 붓글씨를 쓰고, 친척과 친구들에게 선물할 전지공예를 만든다. 사람들이 내가 만든 작품을 칭찬해주고 좋아하는 걸 보면 전통 전지공예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커진다. \n\n자라면서 나는 무형유산으로서 전지공예가 소실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중국은 물론 전세계가 이 전통 문화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전승자들에게 많은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전통예술을 좋아하는 십대 청소년으로서 나는 해당 문화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함께 전지공예를 배우자고 했다. 내 할머니는 전지공예 확산과 전승을 위해 누구나 무료로 들을 수 있는 전지공예 강의를 열었다. 청년과 아이, 부모 등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까지, 전지공예를 좋아하는 이들이 강의에 참여했다. 우리는 전지공예를 만들고, 연습하고, 관련 대회와 전시에도 참여했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전지공예를 알게 되고 이 예술을 전수하게 되었다\n\n대학생이 된 지금 나는 전지공예를 배우고 보급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과 방법을 갖게 되었다. 2018년 여름사회활동 기간에 나는 열명이 넘는 친구들을 데리고 전지공예에 관한 체계적 설문조사를 수행하기 위해 내 고향, 산둥성 빈저우를 방문했다. 내 할머니를 포함하여 네 명의 전지공예 전승자들을 인터뷰하고, 이들로부터 전지공예 기술을 배우는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우리 학교인 상하이자오퉁대학 건물을 전지공예로 만들어 보았다. 또한 유치원을 방문해 지역 아이들이 전지공예를 배우는 걸 도왔다. 아이들의 눈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를 보고, 내가 처음 가위를 잡고 희열을 느꼈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나는 할머니를 도와 전지공예의 확산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꼈다. 또한 전지공예를 더욱 보호하고 진흥시키기 위해, 우리는 전지공예로 학생과 선생님들이 좋아할 만한 엽서를 만들었다. 학교를 본 딴 엽서는 선물용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고, 중국 문화 상품으로서 국내외 대학교간 교류에 사용되기 시작했다.\n\n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청년들은 현명한 조상들이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을 물려받음과 동시에 최신 문화의 영향과 유산 소실의 위험을 마주하고 있기에, 이러한 문화들의 전승과 혁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번은, 할머니가 길을 걷다가 떨어진 낙엽을 여러 개 주워서 이들의 모양을 유심히 살핀 후 전지공예 문양으로 그려 넣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세상 어느 것도 완벽하게 똑같은 것은 없다. 전지공예에선 나뭇잎 문양도 수천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고찰하고 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환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문화적 힘일 것이다. \n\n무형유산에 관심이 많은 나는 올해 여름방학에 학교에서 마련한 중국 남서부 무형유산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창작 제품을 만들어서 지역민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적이었다. 프로젝트를 위해 소수민족들이 모여 사는 구이저우성을 방문했다. 묘족 어린이들이 여전히 민족적 특징을 가진 자수와 은장식구를 배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수천 개의 묘족 부락 관광지를 관리하는 분을 인터뷰하며, 지역 비유산 문화의 전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교육으로, 무형유산을 학교에 도입하여 학생들이 해당 문화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업화로, 비유산 문화를 기반으로 시대에 맞게 변화된 문화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를 확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지공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지공예의 본질은 유지하면서 시대에 따른 혁신을 가하는 것이 최선의 전승 방법이다. 빈저우 전지공예 전승자 가운데 한 명인 겅(Geng)은 전지공예 요소를 적용한 청색 날염 옷감을 만들어서 판매했다. 상업화는 그에게 큰 수익을 안겨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지공예 문화를 촉진하는 데 일조했다.\n\n나는 아직 대학생이라 큰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예술과 커뮤니케이션, 기타 전문 지식을 습득하여 내 고향의 무형유산을 촉진하고 혁신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같은 뜻을 동료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나고 함께 노력하여 이 소중한 전통 문화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길 바란다.\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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