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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몸으로 배운 삶의 지혜가 담긴 한복(韓服)을 만나다.
박술녀

 

한복연구가 박술녀

 

몇 년 전 큰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 ‘시크릿가든’. 극 중에서 배우 현빈은 자신의 파란 트레이닝복의 가치를 몰라보는 길라임에게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이런 말을 한다. “이건 그쪽 이 생각하는 보통 추리닝이 아니야, 이태리의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비록 여주인공은 그를 외면하고 가버리지만, 남자 주인공은 상대가 사라진지도 모른 채 열심히 설명한다. 자신의 운동복이 얼마나 가치 있고, 공들여 만들어졌는지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보통 자기가 아는 만큼 본다고 한다. 이것은 자신이 무엇을 인지하는지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한복’은 효율성과 속도를 숭배하는 우리에게, 도회적 의미로 미끈하지 못하면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옛날 옷, 특별한 날에만 입는 의복 정도로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43년째 한복 짓는 일에 매진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손(手)’의 수고로움과 ‘손(手)’의 사고(思考)로 그런 편견을 희석하며 한복을 오늘의 일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박술녀 한복연구가를 만났다.

 

엄마의 한복, 운명이 되다.

그녀가 한복 짓는 일을 택하게 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충남 서천에서 7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동네잔치가 있는 날이면 늘 한복을 차려 입고 나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한복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머니가 생선 장사를 하셨는데, 하루 종일 생선과 함께 한 어머니가 친척들 결혼식이나 동네잔치가 있는 날이면 꼭 한복을 차려 입고 나가시는 모습이 참 인상 깊었어요.”

 

어머니에게 바느질을 배운 그녀는 바느질로 헌 옷을 깁는 일, 간단한 옷을 만드는 일 등으로 밤을 새운 적이 많았다.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가는 날이면 한복집 앞에서 눈을 떼지 못 할 만큼 한복을 좋아한 그녀는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꿈을 잠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상상을 못할 만큼 배고픈 시절이었어요. 집안의 입 하나 덜려고 어린나이에 식모살이도 해보고, 천안의 방직공장에서 일도 했었죠.”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천안의 방직공장에서 일하다 서울로 상경한 때가 그녀의 나이 스물네 살 때였다.

 

“다들 너무 늦었다고 했지만 우리 어머니는 세상이 변해도 우리 옷은 남을 테니 열심히 배워 보라며 없는 형편에 여비를 챙겨주시더라고.. 그 돈을 손에 쥐고 무작정 서울로 온 거에요.”

 

어머니의 응원에 힘입어 부푼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해 무작정 한복집을 찾아갔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끈기와 열정으로 학원 몇 곳을 오가며 어렵게 공부하다 스물여섯 살 되던 무렵 우리나라 1세대 한복디자이너 이리자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면서 그녀는 본격적으로 한복 짓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잠자는 시간을 쪼개가며 일했어요. 하루 세 시간도 채 못자며 일했었지.”

 

잠자는 시간도 쪼개 가며 오랜 시간 한복을 위해 열정을 불태운 그녀는 문하생으로 공부한지 5년 만에 독립해 1986년 서울 군자동의 10평 남짓한 공간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한복집을 열었다.

  • 박술녀 장인의 아버지(박순귀님)와 어머니(우복열님)
    박술녀 장인의 아버지(박순귀님)와 어머니(우복열님)

  • 박술녀장인의 공방에는 '비단곳간'이라할정도로 다양한옷감들이 가득하다.
    박술녀장인의 공방에는 '비단곳간'이라할정도로 다양한옷감들이 가득하다.

 

무늬만 엄마, 빵점짜리 아내일지라도

“내 나이 32살에 문을 연 작은 동네 한복집이었는데 입소문을 타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어요. 심지어 새벽에도 문 두드리는 손님이 있으면 문 열어주고 그랬다니까. 그렇게 열심히 일할 무렵 우리 남편도 만났죠.”

 

스물일곱 번째 선 자리에서 그녀는 키 크고 인물 훤칠한 공무원인 남편을 만나 두 아이를 낳았다.

 

“나는 무늬만 엄마고, 빵점짜리 아내였어요. 거의 매일을 새벽까지 바느질 하면 우리 남편은 우는 애들 업고 달래면서도 책을 읽더라고.. 일이 점점 늘어나서 집안 일,육아는 모두 남편 몫이었어요.”

 

그 누구보다 아내의 재능을 인정해준 남편은 20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아내를 위한 외조에 나섰다.

 

“한복주문은 늘어나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내가 남편한테 사정했어요. 3년을 애원한 끝에 우리 남편이 내 뜻을 받아줬죠.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워요.”

 

냉철하면서도 침착한 성품을 지닌 그녀의 남편은 “한복의 수요가 줄어든다 해도 실력이 있고 튼튼한 자본력이 뒷받침 된다면 끝까지 살아남는다”라고 조언하며 그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한때 정말 힘들어서 가게 문을 닫을까도 생각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럴 때 마다 절대 손에서 바늘 놓지 말라고, 끝까지 현역에 있어야 한다고 나를 채찍질 해준 사람이 우리 남편 입니다.”

 

학고창신(學古創新)의 정신을 되새기며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마중물’과 같은 남편의 외조로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한복연구가로 성장한 그녀는 조용하고 단아하고 정적인 한복의 이미지를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전통 복으로 탈바꿈시키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보통, 한복하면 저고리, 치마에 마고자 두루마기 정도만 연상하는데, 거기에서 벗어나서 배자, 방한모, 조끼 등 다양한 아이템을 개발해 소개하려고 연구를 많이 했어요. 게다가 다양한 액세서리까지 첨가해 한복의 이미지를 좀 더 고급스럽고 풍성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죠.”

 

옛것을 배우고 익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학고창신(學古創新)’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그녀의 노력이 한복의 대중화에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왼쪽부터 가수 박진영, 박술녀 장인, 그리고 가수 비
왼쪽부터 가수 박진영, 박술녀 장인, 그리고 가수 비
예술가 데이비드 라샤펠(앤디워홀 수제자)
예술가 데이비드 라샤펠(앤디워홀 수제자)
생활용 의료전패션쇼. 왼쪽부터 박술녀 장인, 김정숙 영부인, 탤런트 박진희, 가수 션.
생활용 의료전패션쇼. 왼쪽부터 박술녀 장인, 김정숙 영부인, 탤런트 박진희, 가수 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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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을 위한 한복대통령의 끊임없는 노력

“고객들이 나한테 한복대통령이라는 애칭을 지어줬어요. 대통령이라고 하니까 더 노력을 안 할 수가 없겠더라고.”

 

거친 옷감도 곱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바느질인 것처럼, 옷이 거칠어 보이면 입는 이의 품위가 살지 않기에 ‘백년 입을 옷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한복을 짓는다고 그녀는 말한다.

 

한복에 대한 그녀의 투철한 신념과 따뜻한 마음은 국내외를 비롯한 여러 유명인사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며 더욱더 입소문을 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2021, P4G 서울 녹색미래 정상회의 부대행사로 열린 <새 활용 의류 전>에서 그녀는 친환경 소재로 만든 한복을 선보여 각광을 받은 바 있다.

 

“버려진 것을 보다. 새로운 것을 입다”라는 행사의 슬로건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우리의 옷 ‘한복’도 다양한 소재로 얼마든지 색다른 멋을 담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직원들과 작업했어요.”

 

한복은 만드는 이의 체취, 체온, 그리고 정성과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우리만이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옷이다. 그녀가 지은 한복은 퇴화된 옛날 옷이 아니라, 기억을 오래 지속시켜줄 오늘의 ‘옷’ 이다. 이 거룩한 뜻 때문에 그녀는 새 한복을 지을 때마다 고심하고 고민한다. 정상궤도에 올라섰으니 이제 좀 천천히 달려도 되지 않겠냐고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는 신발을 신은 것처럼 여전히 한복의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 매진 중이다. 가난한 흙 수저에서 한복대통령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 흘렸을 그녀의 눈물과 땀 그리고 불굴의 의지가 있었기에 오늘날 ‘한복대통령’ 이라는 그녀의 수식어가 더욱더 빛을 발하는 듯하다.

저자 정보 : 서주희 문화캐스터(KBS)
출처 :
월간민화(www.artmi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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